운전기사한테 차를 옮기라고 한 뒤, 그녀는 주진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 이사님, 편히 구경하시게 의자라도 하나 옮겨드릴까요?”주진모는 그녀가 남들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리 사람을 끌고 가게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진씨 가문에 들어간 뒤 오만방자한 것이 고모까지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소문도 두렵지 않은 건지?계속 남아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체면이 체면인지라 도아린이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주진모의 차가 떠나자 막혔던 차들이 줄줄이 떠났다.구경꾼들은 도아린의 정체를 몰랐고 그저 고모와 조카 사이인 것밖에 알지 못하였다. 윗사람은 땅바닥에서 떼를 쓰며 뒹굴고 있고 아랫사람은 횡포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순식간에 이론이 분분해졌다. “고모와 조카 사이라고? 얼마나 큰 원한이 있어서 저러는 거야? 어른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다니.”“듣기로는 얼마 전에 찾은 딸이라고 하던데. 집안 재산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지금은 남녀가 평등하니까 고모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거잖아.”대화의 주제가 점점 산으로 기울어지자 도아린이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다들 선진 투자 회사라고 들어봤죠? 요즘 엄청 잘 나가는 투자회사인데.”이때, 한 사람이 소리쳤다.“알죠. 수익률이 7%나 된다고 들었어요. 우리 친척들도 그 회사 주식 많이 샀거든요. 어제는 차까지 한 대 뽑았다고 하더라고요.”“선진 투자 회사요? 들어봤어요?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들어봤죠. 그런데 2억 이하는 투자를 안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난 그만한 돈이 없어서 남들이 돈 버는 거 지켜볼 수밖에 없네요.”도아린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진옥경은 큰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진세은, 그 투자 회사의 수익이 네 말대로 그렇게 좋은 거라면 고모한테 돈 좀 빌려줘. 나도 투자 좀 하게.”선진 투자 회사를 통해 돈을 그렇게 많이 벌 수 있는 거라면 이 소식을 얼른 안민아에게 알려야 한다. 딸과 사위의
나쁜 년.선진 투자 회사는 또 뭐야? 일부러 말을 돌려 날 괴롭히려고 한 거겠지. 그 남자에 의해 회사까지 끌려간 진옥경은 그 회사가 정말 도유준의 회사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도유준은 그녀를 본 순간 당황했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를 보고는 바로 창문을 넘어 도망쳤다.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한편, 도유준은 집으로 달려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안민아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네 엄마가 빚쟁이들 데리고 회사까지 찾아왔어. 이제 막 돈을 좀 벌기 시작하는데 너희 엄마 때문에 다 일이 틀어지면 나 정말 가만 안 있을 거야.”...배지유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도아린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 그녀도 나서서 한마디 보탤 생각이었는데 도아린이 진옥경에게로 화제를 돌리고 그 자리를 쉽게 빠져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도아린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르니까.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금은방을 지날 때, 그녀는 김지민이 남동생 내외를 데리고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배석준은 옆에 버려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내 택시에서 내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배석준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배석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을 흘리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올케 마음에 들면 그냥 다 사.”남동생이 어렵게 잡은 여자 친구이기 때문에 그녀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생각이었다. 김지민은 두 사람에게 먼저 옷 구경을 하라고 하고는 계산을 하러 갔고 고개를 돌리니 배석준이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이 회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재민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어제는 회사로 데리러 오라고 하던 사람이 오늘은 식당에서 보자고 했고 방금은 통화를 하다가 일이 있다고 먼저 끊어버린 그녀였다. 자신과의 데이트가 부담스러워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 강재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 도착했어
“당신은 최지우가 왜 내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이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그 말에 육청아는 순간 멍해졌고 이내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도아린에게 속아 넘어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러나 도아린이 알더라도 상관없었다.배건후가 영화 투자에 손을 떼라고 했기 때문에 도아린이 아무리 조사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최지우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육청아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도아린 씨 참 유머러스하네요. 난 최지우의 팬이에요. 모처럼 컴백했으니 팬으로서 꽃길을 걷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에요.”“그 꽃이 불꽃은 아니길 바라요.”도아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경멸이 가득 찬 웃음, 육청아는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자기한테 자랑하는 것 같아서 정말 꼴불견이었다. 보스가 도아린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그물을 빠져나간 인신매매범을 찾기만 한다면 결국은 자신의 편에 설 거라고 믿었다. 몇 마디 반박하려는 그때 도아린은 뒤돌아섰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끼익. 이때,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와 육청아의 길을 막아섰다.화가 나서 운전기사를 노려보는데 배건후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내 화를 억누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배건후는 그녀를 한 번 흘겨보고는 핸들을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다.“이렇게 직접 그 여자를 찾아오면 어떡합니까?”남자는 차 문을 세게 닫으며 따져 물었다. 육청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얘기했다.“이곳에 밥 먹으러 온 모양이에요. 우연히 만났고 인사만 잠깐 나눈 거예요.”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따로 룸을 예약하지 않은 강재민은 창가에 앉아 있다가 도아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이쪽이에요.”그녀가 웃으며 다가가자 강재민은 그녀의 가방을 받아 옆 선반 위에 걸어놓고 의자를 당겨주었다.신사다운 모습이었다.“고마워요.”“당연한 걸요.”자리에 앉
“5분이면 음식도 다 준비될 거예요.”강재민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한마디 내뱉었다.그러나 냅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도아린은 그걸 눈치챘다.분명 내키지 않으면서 너그러운 척하기는...“배 대표님.”이때, 육청아가 앞으로 급히 달려왔다.“우리도 일단 주문부터 해요.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요. 강재민 씨가 아린 씨한테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니까 방해하지 말고요.”그녀는 배건후의 팔짱을 슬쩍 끌어당겼고 그 행동에 배건후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살짝 주눅이 들긴 했지만 배건후를 끌고 가지 않으면 보스가 또 무슨 벌을 내릴지 모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배건후를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진통제부터 먹어요. 도아린 씨가 기회를 주더라도 지금 몸 상태로는 버티기 힘들 거예요.”고개를 돌리고 도아린과 강재민을 쳐다보던 그는 결국 육청아의 손에 끌려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두 사람의 맞은 편이었다. 잠시 후, 강재민은 종업원에게 도아린의 물컵과 냅킨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가는 게 싫으면 분명히 말해요. 겉으로만 아닌 척하는 거 나 정말 싫어요.”“속 좁은 남자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요. 아린 씨가 싫어할까 봐...”“내가 싫어하는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쳐다보았고 피식 웃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당신한테 상처 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치고는 일부러 배건후 쪽을 쳐다보았다. 마침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예리한 눈빛과 사악한 눈빛, 그 누구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종업원이 음식들을 내오자 팽팽하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음식이 다 나온 뒤, 강재민은 바이올린 연주자를 불러 테이블 옆에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하였다. 뭘 연주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배건후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유치한 행동에 도아린은 미
위가 아픈 것을 참으며 뒤따라간 배건후는 강재민의 벤츠가 어둠 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 보게 되었다. 급히 자신의 차에 올라탄 그는 육청아가 차에 오르기도 전에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상영관에 들어가기 전에 강재민은 팝콘과 콜라 두 잔을 샀고 두 사람은 티켓에 적힌 대로 제자리를 찾아가 앉았다.이번 영화는 스릴러 영화로 관객이 많지 않았고 상영관에 관객이 10명 남짓하였다.영화가 시작되자 누군가 허리를 굽힌 채 뒤로 걸어갔다. 도아린과 강재민은 셋째 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무서워요?”강재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워서 재민 씨 품에 안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녀가 팝콘을 내밀자 강재민은 팝콘을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그런데 난 무서워요.”그 말에 도아린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이렇게 덩치가 큰 남자가 귀신을 무서워한다고?강재민은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스크린이 번쩍였다. 스릴러 영화에 꼭 나오는 장면, 조명이 깜빡이면서 배경음악과 함께 귀신이 나타났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 채 한 손으로 팝콘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찰칵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그는 정말 무서운 듯 한껏 긴장한 얼굴이었다. “외국에 뱀파이어 영화들도 많잖아요. 그것도 무서워요?”도아린이 웃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뱀파이어는 머리가 잘려 나가고 혀를 내두르지는 않아요.”그는 말을 하면서 정신없이 팝콘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악. 이때 구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던 그는 팝콘이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그녀는 급히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콜라를 건네주었다.벌컥벌컥 콜라를 마시니 조금은 진정되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콜라를 받침대에 놓는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그가 방금 마신 건 도아린의 콜라였다. “미안해요. 난...”그는 시한폭탄이라도 들고 있듯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내
뒤에 있던 사람이 배건후에게 앉으라고 주의를 줬고 그는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강재민이 도아린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영화표를 뭉쳐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강재민은 이내 고개를 돌렸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는 한 쌍의 커플만 보였다.그 커플은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때, 도아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코끝이 서로 마주쳤다.흠칫하던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계속해서 팝콘을 먹었고 강재민은 그 자리에서 얼굴이 빨개지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카리스마 넘치던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꽃가마를 탄 처녀처럼 긴장되고 설렜다. 사실 도아린이 배건후에게 그와 만나보려 한다고 했을 때 기분이 되게 좋았었다. 방금은 그녀의 콜라도 마셨고 지금은 코끝까지 부딪히고... 비록 짙은 스킨십은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가 한결 가까워진 듯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진 그는 몸을 꼬며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예요?”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푸흡!입안에 있던 팝콘이 그의 얼굴에 뿜어졌고 그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 옷을 털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를 끌고 먼저 자리를 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도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는 덩달아 크게 웃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그친 그녀가 그를 향해 물었다.“너무 심하게 웃었죠? 숙녀답지 않아서 내가 싫어진 거 아니에요?”그는 그녀를 마주한 채 길가의 울타리에 걸터앉았다.“나 잘 때 이도 가는데. 아린 씨는 괜찮아요.”“조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 같다. 아쉬울 것 없이 잘살 때는 감정이 바위처럼 단단하다가도 일단 저울의 균형이 무너지면 여러 가지 이유에 휩쓸려 원래의 단단함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강재민은 두 손을 천천히 가운데로 모으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요. 다 털어버리고 이젠 깨끗이 내려놓아요.”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밤바람과 함께 그녀의 귓속으로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배건후는 그녀한테 첫사랑이었다. 그를 보면서 사랑에 대한 모든 환상을 품었고 몇 번이나 그에게 상처를 받아도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게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실망이 쌓이다 보니 아무리 깊은 감정도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 현재 배건후에 대해서는 사랑보다는 가슴속에 맺힌 원망뿐이었다.멋대로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그의 멸시가 원망스러웠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꾸만 다가오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고 강재민은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주었다. “내가 가서 그 나쁜 놈 혼내줄까요? 감히 내 여자를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아니요.”도아린은 그의 옷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사람 때문에 우는 거 아니에요.”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눈 밑에 희망이 차올랐다.“나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가 아린 씨 괴롭혀서?”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방금 영화관에서 일부러 그런 거죠?”이전부터 강재민을 알고 있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게 된 건 그녀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였다. 강재민의 천성은 뱀파이어처럼 변덕스럽고 악랄하며 때로는 오만방자하고 때로는 사악하고 독단적이었다. 귀신이 무서워서 사레까지 들리고 연약한 척 그녀한테 의지하는 건... 그의 본성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오랜만이야.”강재민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손끝이 닿기도 전에 진경수가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주먹에 강재민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겨우 멈춰 섰다. “경고하는데 내 동생 건드리지 마.”진경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또 한 번 내 동생한테 집적거리면 주먹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난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니까.”“오빠...”“걱정하지 마. 오빠가 네 편이 되어줄 거니까.”진경수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온화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변하였고 그가 강재민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아린이는 우리 진씨 가문의 귀한 딸이야. 강씨 가문이 아무리 명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내 동생이 싫다면 넌 강요할 수 없어.”“오빠...”도아린이 그의 팔뚝을 잡고는 애교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재민 씨는 날 괴롭힌 적 없어요.”“똑바로 말해. 너 아까 울었던 거 아니야? 눈이 이렇게 새빨간데.”“운 건 맞아요. 하지만 화가 나서 운 게 아니라 재민 씨한테 감동받아서 운 거예요.”“들었지? 또 한 번만 괴롭히면 내가 정말 가만두지... 뭐라고?”진경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감동받았다고?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데?”입가를 닦고 있던 강재민의 눈 밑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내 진심에 감동받은 거지.”그가 앞으로 다가가자 진경수는 도아린을 감싸며 이리저리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나 결국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한쪽 손을 뺏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깍지를 끼고 진경수에게 보여줬다. “우리 애기가 내 마음 받아줬어.”우리 애기?진경수는 이를 꽉 물었다.그가 시큰둥하게 입을 삐죽거리며 여동생을 돌아보았다.“저 자식이 널 위협한 거라면 눈만 깜빡여 봐.”“오빠, 우리 두 사람 진지하게 만나보기로 했어요.”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얘기 끝난 일이에요. 만나보다가 안 맞으면 헤어지기로요. 매달리지
“일단 이 사건부터 해결하죠.”그를 보는 경찰관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의심이 들었지만 아주 은밀하게 처리하였으니 절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나름 꽤 침착한 모습이었다. 인쇄된 종이를 들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 점점 공포가 가득 드리웠다. “이건 말도 안 돼...”종이를 움켜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공포가 밀려와 온몸이 저렸고 간신히 침을 꿀꺽 삼켰다.“이건 위조야. 조작된 게 틀림없다고.”“핸드폰은 기술팀에 감정의뢰를 맡길 겁니다. 채팅 내용 및 통화 시간을 포함하여 모두 다 확인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요.”경찰관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가짜가 진짜로 될 수도 없지만 진짜가 가짜로 될 수도 없습니다.”안준휘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분명 채팅 기록을 다 지웠는데. 왜 손보미와의 채팅 내용이 아직도 핸드폰에 남아있단 말인가?“그럴 리가 없어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핸드폰은 이미 기술팀으로 보내졌다. 손보미와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 윤명희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보면 볼수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도아린이 아니었다면 당신 딸이 도유준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모든 건 도아린의 계획이에요. 안민아가 자신보다 더 잘난 것이 못마땅하여 일부러 안민아를 망친 거라고요. 그런데 아직도 도아린이 좋은 사람으로 보여요?][도아린 그 계집애를 강씨 가문으로 데려오기만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망신을 당하게 할 거예요. 강씨 가문에게 빌붙을 생각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혈연관계가 없는 남동생과 관계를 가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하겠어요.][도아린만 제거하면 우리 안씨 가문에게 다리를 놓아줄 거라고 했지? 약속 꼭 지켜.]“안준휘, 이 망할 인간.”윤명희는 어금니를 깨물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마다 손보미가 도아린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힘이 담기조차 힘
도아린은 피식 웃었다.“만약 있다면요? 그동안 진씨 가문에서 가져간 돈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약속해요. 이제부터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도 약속해요.”병원비?아내의 병원비를 자신이 부담해야지 남한테 떠맡기는 게 무슨 경우인가?진옥경의 병원비뿐만 아니라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해친 대가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입술을 덜덜 떨던 그가 독기가 가득 찬 눈을 들고 입을 열었다.“약속하지.사적으로 합의가 된다면 경찰들도 굳이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내 안준휘는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털털하게 의자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아린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듯 당당한 그의 모습에 윤명희는 내심 걱정되어 도아린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잠들기 전, 그녀는 서대은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날이 밝으면 안준휘를 찾아가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그러나 안준휘가 지금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으니 그녀 또한 봐줄 생각이 없다. 경찰은 통화 기록과 채팅 기록을 확인해 보았지만 손보미와 관련된 기록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동료에게 넘겼고 동료 경찰관이 다시 한번 조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도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에는 손보미 씨와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안준휘는 로또라도 당첨된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교통사고는 합의를 한다고 약속했지만 네가 날 모욕한 일은 끝까지 추궁할 거야.”도아린은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독기가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삭제한 핸드폰 기록도 복구가 될 수 있다는 거 모르고 있나 봐요?”안준휘 뿐만 아니라 두 경찰관들도 모르고 있었다. 혐의를 피하기 위해 도아린은 핸드폰을 건드리지 않고 경찰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두 경찰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 프로그
도아린은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진옥경의 병세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한밤중에 병원에 달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에는 진옥경의 남편인 안준휘가 있으니까...옷을 입고 거실로 내려오니 그들이 병실을 나선 뒤 안준휘도 병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병원 측에서는 환자의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자 병원비를 지불한 진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경찰서는 엄마랑 같이 가.”윤명희는 가방을 챙기고 도아린의 손을 잡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윤명희가 말을 이어갔다.“안준휘가 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피운 모양이야. 사고 난 차가...”말끝을 흐리며 진경수를 쳐다보는데 늘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얼굴도 약간 심각해 보였다. “손보미 차예요?”담담하게 묻는 도아린을 향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준휘는 가해자가 도아린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서 가해자의 원래 목적은 도아린이었고 진옥경은 그저 재수 없게 연루되었을 뿐이라고 이 사건은 반드시 끝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시 후, 경찰서로 달려온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안준휘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왜 두 사람 사이의 원한 때문에 내 아내가 이런 화를 입어야 하는 겁니까?”“진정하시죠. 당신이 말한 게 사실인지는 저희도 확인해 봐야 합니다.”“인터넷에 지금 난리인데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배건후가 이혼한 후에 손보미와 약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아린과 다시 재결합을 원하고 있으니 손보미로서는 당연히 달갑지가 않은 거죠. 손보미가 복수하고 싶은 사람은 도아린이라고요. 당신들이 어떻게 조사를 하든 간에 내 아내의 병원비는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손보미가 치려고 했던 사람이 저인 게 확실해요?”이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재킷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훤칠하고 날씬해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 압박감
“동생한테 왜 이렇게 거칠게 굴어?”“대호 오빠, 우리 오빠가 날 자수하러 끌고 갈 거래. 안 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쉿.”성대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토닥이고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사람을 친 차는 빨간색 람보르기니야. 그 차는 손보미 씨 차 아니야? 네가 아무리 손보미 씨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유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을 해?”배지유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성대호의 허리를 꼭 감싸안았다.“그러니까요. 손보미를 찾아가요.”배건후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배지유가 사람을 쳤다고 알린 것도 성대호였고 이제 와서 차 주인이 손보미라고 하는 것도 성대호였다. 만약 미리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 성대호에게 말려들었을 것이다.“너도 알다시피 차량을 빌린 사람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운전자는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아니. 아니지.”성대호는 고개를 저으며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현장 CCTV 확인해 봤어?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야? 배건후, 난 늘 네가 똑똑하고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혼하고 나서부터는 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지? 그저 만만한 게 지유니까 지유만 괴롭히는 거야?”배건후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이간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여동생의 갈등을 증폭시켜 도아린과 화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 싶어 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든 일단 경찰서는 다녀와야 해.”배건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그런데 이때, 눈빛이 바뀌던 성대호가 갑자기 배지유에게 손을 떼고는 핸드폰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그 바람에 배지유는 비틀거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한걸음 뒤로 물러난 배건후는 몸을 돌려 성대호의 손길을 피하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들어 올려 차 문에 기대게 하였다. 그 순간, 성대호가 갑자기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팔꿈치로 성대호를 공
무뢰한 인간.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던 진경수는 안준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교통사고부터 처리하시고 경찰서로 가서 사기 사건도 처리하시죠.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뭐?”벌컥 화를 내는 사위의 모습에 차화영은 엉겁결에 몸을 피하다가 문에 팔꿈치를 부딪쳤고 너무 아파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떨지 않던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어미야. 내 손이...”윤명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딪힌 곳을 주물러주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먼저 병실을 나섰다. 진경수도 도아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같은 시각, 발걸음을 옮기던 진범준은 복잡한 눈빛으로 안준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집에 돌아온 뒤, 진범준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깨에서 전해진 따뜻한 기운에 윤명희는 손을 뻗어 남편을 감싸안았다.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남편이 여동생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한편, 배지유는 차를 성대호에게 수리를 맡긴 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배석준이 김지민에게 아파트를 마련해준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퇴원하고 나서부터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빠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살 생각이었고 아무도 그녀를 쫓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배건후를 보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오빠는 교통사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겁부터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심호흡하던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통제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빠, 아빠 보러 왔어요? 왜 여기 있어요? 같이 올라가요.”배건후는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은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마음을 들킨 줄 안 그녀는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조금 덥네요.”“다리를 다쳤는데도 운전을 하는 거야?”“왼쪽 다리를 다친 것뿐이에요. 그리고 자동 기어는 왼쪽 다
“뭐 하는 겁니까?”진경수가 안준휘의 손목을 잡고 힘껏 뿌리쳤다.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안준휘는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는 두 눈이 새빨갛게 변한 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위선 떨지 마. 옥경이가 잘못되면 당신들 용서 안 해.”“안 서방. 옥경이는 내 딸이야. 딸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울음은 그친 차화영이 눈을 붉히며 따져 물었다.“쓸모가 있을 때만 딸인 겁니까? 정말 딸로 생각한다면 죽는 걸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았겠죠.”안준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난... 그게...”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차화영은 윤명희를 쳐다보았다. 윤명희가 자신을 모른 척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고 아들도 그녀를 무시했다.“내가 왜 옥경이를 도와주지 않았나? 옥경이 때문에 난 범준이네와 사이가 틀어질 뻔했어.”“그래요. 장모님한테는 아들밖에 없잖아요.”“안 서방,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범준이가 사준 해남의 집도 자네들이 원하자 난 두말없이 넘겨주었네. 돈이 모자라다고 해서 난 아들한테 거짓말까지 하며 돈을 구해줬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 건가?”차화영은 그동안 비밀에 부쳤던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아들한테서 돈을 뜯어내어 딸한테 보태준 사실들을 다 말하자 안준휘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를 보니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차화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분풀이를 하려면 옥경이를 치고 달아난 그 사람한테 가서 해.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 옥경이가 이 지경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데 자네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연락은 왜 안 되는데? 자네가 이 나라 대통령보다 더 바쁜 사람인가?”사나운 그의 눈빛에 놀란 차화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무의식적으로 윤명희에게 기대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제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도 책
“할 말이 있어.”어디론가 전화를 건 성대호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화기 맞은편, 그의 목소리를 눈치챈 배건후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젠 안 피해 다녀?”“응, 숨지 않으려고.”성대호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구경 좀 하려고 돌아온 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성의 배씨 가문. 너희 아버지는 병들고 네 동생은 불구가 되고 넌 이혼까지 하고... 어떤 기분이냐?”남의 속을 긁으러 온 모양이군.배건후는 기분이 역겨웠다.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의자에 기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배씨 가문에서 아린이한테 잘못한 거야. 난 최선을 다해 만회할 생각이고.”성대호는 웃음이 터진 듯 깔깔대고 웃었다.“그전에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시간 전이라면 너한테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무슨 뜻이야?”배건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가로수길 사거리에서 지유가 차를 몰고 가다가 도아린의 고모를 치고 도망쳤어. 전에도 지유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써서 도아린한테 합의서에 사인하도록 강요했었잖아.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거야.”그 순간, 도아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성대호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구경꾼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배건후, 넌 대단한 인간이잖아. 도아린을 되찾으려는 거 아니야? 어디 한번 두고 봐. 아내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어떻게 만회할 수 있는지...이 세상에서 깨진 거울이 다시 붙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깨졌으면 깨진 거지 원래대로 복구가 되겠어?난 배지유한테 농락당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배건후 너만 잘되라는 법 없잖아. 한편, 진옥경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수술 동의서에 가족의 사인이 필요했지만 안준휘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윤명희가 차화영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와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수술하는 동안 병원 측에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보를 두 번이나 받게 되었다
차 앞까지 쫓아온 진옥경은 진범준 쪽의 문고리를 잡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정말 안 도와줄 거야? 오빠가 모른 척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버릴 거야.”그가 차창을 내리고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진옥경, 우리 남매 사이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 네가 날 상대로 이런 짓까지 벌이지 않았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겠지.”“그래서 정말 안 도와줄 거야?”...진범준은 아무 말도 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옆에서 보고 있던 진경수는 아버지가 또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되어 단칼에 거절하려고 하였다.그런데 이때, 진범준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나도 방법이 없어.”“그래? 정말 나보고 죽으란 소리네?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진옥경은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봇대에 부딪히면 큰 상처를 입기는커녕 머리만 아플 것이다. 진범준이 죄책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상처를 입어야 차화영이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지 않겠는가?아무리 둘러봐도 근처에 경상을 입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이내 결심을 내렸다. 진옥경이 뒤돌아서자 진경수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막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진옥경이 사거리로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빨간 람보르기니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는데 그녀가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펑!람보르기니에 부딪힌 진옥경은 높이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차량 앞부분에 떨어지더니 차량 지붕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자는 아마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들 줄 몰랐던 것 같았다.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사람을 치고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도로를 질주했다. 진경수는 멀지 않은 곳에 급히 차를 세우고는 지나가는 차량이 진옥경에게 2차 피해를 줄까 봐 바로 119에 신고했다. 한편, 도아린은 빨간 람보르기니가 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번호판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그러나 왠지 낯익은 숫자와 차량 모델, 우연의 일치일까?그 차는 바로 손보미의 차량
“오빠.”어두운 진범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에 빠져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진옥경, 정말 너한테 실망이야.”진옥경?오빠가 나한테 진옥경이라고 한 거야? 왜 이렇게 서먹하게 불러?설마 나랑 연을 끊으려는 걸까?안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진범준이 그녀한테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안씨 가문에서 그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오빠.”그를 향해 팔을 뻗는데 진범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방금 그 여자, 아빠한테 꼬리치라고 고모가 시킨 거죠. 아빠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게 하려고요. 내가 직접 봤는데 그래도 변명할 거예요?”도아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옥경을 쳐다보았다. “어른이 말하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진옥경은 모든 것을 도아린의 탓으로 돌렸다. 도아린이 도유준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경찰들이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잡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진범준의 약점을 잡아 도움을 강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모든 건 도아린의 탓이었다. “오빠, 일단 들어와. 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민아한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어. 나도 마찬가지고...”진범준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고 방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했다.“내 눈으로 직접 봤고 내 귀로 직접 들었어. 민아와 도유준이 내 딸을 노리고 있다는걸.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날 상대로 그런 짓을 꾸며?”진범준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본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오빠, 민아가 잡혀갔어. 오빠가 대신 돈 안 갚아주면 우리 민아 정말 감옥에 갈지도 몰라. 민아는 나한테 하나뿐인 딸이야. 제발 부탁이야 오빠, 이번 한 번만 나 좀 도와줘.”말을 하면서 그녀는 무릎을 꿇었고 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진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