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웃기기도 하지. 당신은 내가 이런 꽃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 꽃을 보면 바람피우는 남자가 생각나요. 그날의 당신처럼요! 내가 아픈 걸 알면서, 내가 그렇게 빌었는데 다른 여자를 보러 갔잖아요.”그녀는 고개를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그때 내 눈에 당신이나 우리 아빠가 똑같았어요.”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풀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안 좋아한다는 거 왜 안 알려준 거야?”온다연이 풉하고 웃었다.“알려주면 어쩔 건데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옷을 입게 하고, 싫어하는 옷을 입게 하고 그런 화장품들을 쓰게 하잖아요.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요. 나도 반항해봤지만, 당신이 그때마다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요? 제품의 회사를 망하게 하고 결국 당신의 뜻을 따르게 만들었잖아요!”그녀는 한번 한숨을 내쉬고 이어서 얘기했다.“유강후 씨, 당신은 정말 최악의 남자예요.”그 말을 끝으로 방에는 다시 정적만 남았다.이 싸움에 승자는 없다.두 사람 다 많은 상처를 입었다.한참 있다가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마음에 안 드는 물건은 버려. 꽃도 뽑고 네가 좋아하는 거로 심을게.”얼마나 주먹을 꽉 쥐어서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였다. 그의 감정을 억제하느라 노력 중인 것 같았다.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려고 애썼다.“네가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심자. 응?”“싫어요!”온다연은 차갑게 얘기했다.“이런 누추한 곳에 해바라기를 심을 생각 절대 하지 말아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침대에 기대서 벌을 기다리듯 눈을 감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저 유강후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온다연은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이곳을 떠나야 한다. 무조건 떠나야 한다.조금만 버티면...그 일만 처리되면 바로 떠날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가 다시 돌아왔다.그는 손에 작은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안에 담긴 건 계화탕이었다. 위에는 계
금방 만든 국이라서 아주 뜨거웠다. 유강후의 손등은 어느새 빨갛게 되어있었다. 온다연은 약간 멍해있다가 얼굴을 돌려 그를 등져버렸다.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온다연은 배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그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연아, 그렇게 날 자꾸만 경계하지 마. 그건 우리의 아이야.”온다연은 여전히 그를 등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부서진 조각들을 주우면서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그 옷들이 싫으면 입지 마. 사람을 시켜 다른 옷을 가져오라고 할게. 네 마음대로 골라.”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온다연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평소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고고하고 강압적인 유강후가 이런 말투로 얘기하다니.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일이었다.하지만 온다연의 마음은 이미 굳어버렸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대답하지도 않았다.유강후는 조각과 흘린 국을 처리하고 온다연을 안았다.“다른 방에서 자. 여기는 더러워졌어.”온다연은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항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저녁이 될 때, 갑자기 사람들이 와서 각종 옷과 가방과 신발을 가져와 거실을 거의 꽉 채웠다.그중 몇 명은 저번에 왔었던 사람들이라 이곳의 규칙을 잘 알고 그 자리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주인공은 아주 늦게 등장했다.유강후가 품에 온다연을 안고 이쪽으로 걸어왔다.하지만 온다연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몇 번이나 돌아가려고 하는 걸, 유강후가 다시 잡아 올 정도였다.하지만 결국 유강후가 다시 온다연을 안고 위로 올라갔다.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도 못했다. 그저 옷을 보여주러 온 모델들만 호기심에 기웃거리고 있었다.입장 전에 함부로 시선을 돌리지 말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호기심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그들은 유강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미래 그룹 대표이자 유
그 안에는 엄숙함과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놀라서 순식간에 고개를 숙였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내려다 주고 얼굴에 붙은 자잘한 머리카락들을 떼어주면서 달랬다.“그 옷들은 다 버리자. 여기는 다 새로운 옷 들이야. 네가 직접 골라. 난 간섭하지 않을게.”온다연은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억지로 끌려 나오고 말았다.어차피 오늘 고르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여기서 서서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다.이때 구월이가 나와서 그녀의 바지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온다연은 구월이를 품에 안고 앞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차갑게 말했다.“이거로 해요.”유강후는 대충 고르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것도 많은데 더 골라봐.”온다연이 입을 열기 전에 한 사람이 먼저 말했다.“우리는 모델도 데려왔어요. 모델의 시착 한번 보실래요?”그러자 유강후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래? 난 옷만 보겠다고 했지 모델을 데려오라고 한 적이 없어! 나가!”그 사람이 연망 해명했다.“저희는 고르기 편하시게 모델을 준비했어요. 온다연 님과 체형이 비슷한...”유강후가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나가. 몇 번 얘기해야 해?”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모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이때 그중 한 모델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유강후를 보면서 살짝 겁을 먹은 채 말했다.“유 대표님, 혹시 저 기억하세요? 전 임청하라고 합니다. 대표님이 후원해 주셔서…수능 때 직접 후원금을 주시기도 했는데...”멈칫하던 그녀는 이어서 얘기했다.“저번에 영원시에서 다치셨을 때 급하게 수혈해야 한다고...”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 모델을 보더니 눈빛을 반짝였다.이때 온다연이 일어나서 차갑게 얘기했다.“알아서 골라요. 난 흥미 없으니까.”말을 마친 온다연은 구월이를 데리고 갔다.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영원시에서 유강후에게 수혈해 준 여자는 확실히 이 모델과 비슷하게 생겼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
임청하는 얼굴을 확 붉혔다. 뭐라 얘기하려는데 이권은 듣지도 않고 떠나가 버렸다.다른 모델들은 임청하를 보면서 웃기 시작했다.“유 대표랑 엮이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야?”“유 대표가 그 여자랑 계속 붙어있는 거 못 봤어? 거기에 끼어들고 싶어하다니... 이상한 미친 년이네.”“유 대표님, 저도 후원받은 학생이에요. 저는 임꽃뱀이라고 합니다. 저 기억하시나요?”“하하하, 정말 똑같다!”“돈에 환장을 했네.” 임청하는 얼굴을 붉혔다. 수표를 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다른 사람들은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오늘 적어도 몇 개는 팔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넌 해고야! 앞으로 이 업계에 얼씬도 하지 마! 꺼져!”...어느새 보름이 지났다.유강후와 온다연의 관계를 여전히 그대로였다.그 모델의 일 때문에, 온다연은 또 유강후를 차갑게 대했다.그러는 동안 온다연의 배는 전보다 더 커졌다. 그래서 더욱 헐렁한 티셔츠로 바꿔입었다.온다연은 키가 작았기에 배도 작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아낼 수가 없었다.유강후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침실 옆의 방을 아이 방으로 바꿔놓았다.너무 큰 방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놀기 좋게 배치해 두었다.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몰랐기에 벽은 흰색으로 칠했고 하늘에는 별빛 모양의 등을 달았다.모든 옷과 신발은 다 두 가지 색깔이었다. 핑크는 딸의 것이고 파란색은 아들의 것이다.유강후는 거의 중독된 것처럼 사람을 시켜서 옷을 사들이게 했다. 어느덧 방에 물건을 둘 자리도 없었다. 장화연은 어쩔 수 없이 방을 다시 정리하고 옷을 다른 곳에 두었다.온다연은 처음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점점 호기심이 동해 몰래 지켜보곤 했다.아이들의 신발, 옷 침구 등 모두 부드럽고 귀여웠다. 한번 봤을 뿐인데 온다연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게다가 구름 모양의 신발을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유강후가 문 앞에
다만 유강후가 이렇게 오랫동안 안고 있으니 속이 불편해서 토하고 싶었다.다행히 이때 장화연이 들어와서 얘기했다.“도련님, 의사가 왔습니다.”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풀어주고 그녀와 함께 거실로 갔다.진맥 후, 주성원은 그저 애매모호하게 요즘 상황이 괜찮다고 얘기했다.온다연이 간 후 주성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유 대표님, 지금 상황이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원래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의사의 말을 직접 들으니 역시 가슴이 철렁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죠?”주성원은 한숨을 내쉬고 얘기했다.“태아의 상황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몸이 너무 허약해서 안 됩니다. 지금 태아에게 영양분을 줄 수 없는 상태예요.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엄마의 영양소를 더욱더 흡수하려고 할 겁니다. 그럼 아가씨는 영양을 다 빨리시는 겁니다.”유강후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6개월 동안 버틸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5, 6개월만 버텨줄 수 있다면, 유강후는 이 아이를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주성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지금 전 세계에서 살아남은 가장 작은 조산아는 5개월입니다. 하지만 그건 특이사례라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온다연 아가씨의 아기처럼 약하지 않았었어요...”주성원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실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한참 있다가 유강후가 얘기했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주성원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제 실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유 대표님이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지켜내기 어렵습니다.”유강후는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누구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만약 온다연이 그의 마음속에 얽혀있는 덩굴이라면 그 아이는 덩굴에서 피어난 꽃이다.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낸 꽃이고 두 사람의 연결고리다.이 아이가 없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날지도 모른다.주
30분 후, 온다연은 병원의 뒷문으로 나갔다.이윽고 한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슈퍼마켓의 뒷문으로 나가 차량번호가 없는 검은색 차에 올라탔다.두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교외에 있는 창고에 도착했다.날씨가 추워서 창고 안에서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양아치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옆에 앉아서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이 온 것을 본 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임정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모자를 눌러써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온다연도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모자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에 양아치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녀 옆에 있는 경호원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다.이때 창고 구석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그 사람의 옷은 꽤 비싸 보였는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빛도 멍했다.온다연을 보더니 눈에 총기가 돌았다. 그리고 휘청거리면서 걸어와 얘기했다.“당신이 전화 속의 그 사람이야? 구경하러 왔어?”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약을 한 거예요?”임정아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맞아요. 약을 했으니까 이런 사달이 났죠!”온다연은 그 사람을 보면서 얘기했다.“얘기했었죠. 4천만 원으로 한번, 그리고 영상까지. 돈은 이미 줬는데, 사람은 어디 있죠?”그 사람은 웃더니 비틀비틀 걸어와서 얘기했다.“예쁜 아가씨, 나랑 하루 잘래? 돈은 안 받을게!”온다연은 뒤로 물러나면서 차갑게 얘기했다.“다시 한번만 나한테 손 대면 그 손 없애버릴 거예요.”그 사람은 희희 웃으면서 물었다.“돈 때문에 그래? 2억에 하룻밤, 어때?”이때 두 경호원이 온다연 앞으로 왔다.“우리는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그에 마땅한 결과를 내놓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질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일할 수 있겠어요?”그 사람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결국 물러서서 한 방을 가리켰다.“저 안에 있어요. 들어가요.”
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유하령을 깔보면서 얘기했다.“틀렸어. 난 이 사람들과 한패가 아니야. 이 사람들은 범죄자고 난 그저 구경하러 온 거거든.”유하령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날 놔줘! 날 놔달라고 해! 온다연! 날 살려줘! 내가 나가면 널 내 동생으로 인정해 줄게! 그러면 너도 진정한 유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거야!”온다연은 손가락을 뻗어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고 했다.“난 유씨 가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저 네 꼴을 비웃고 싶을 뿐이야.”유하령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년! 넌 저놈들이랑 같은 편이잖아! 감히 날 이곳으로 끌고 와?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온다연은 쪼그려 앉아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유하령,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 오늘은 그저 내 몫의 1%를 경험한 거야. 벌이라고 생각해.”말을 마친 온다연은 몸을 돌려 나갔다. 그리고 밖의 양아치들을 보면서 차갑게 얘기했다.“유하령이 당신들을 쓰레기에 아무것도 못 하는 찌질이 주제에 겁만 줬다고 하던데, 정말 쓸데없군요. 이러면서 4천만 원을 받아요? 이런 상황이면 못 주겠는데요?”양아치들은 그 말에 발끈해서 쳐들어가더니 유하령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오늘 내가 너 죽이고 만다!”유하령이 소리 질렀다.“네가? 웃기지 마! 우리 가문 사람들이 곧 올 거야! 그들이 오면 너네는 다 끝장이야!”“x발년, 저번에도 너 때문에 일을 망쳤어! 내가 오늘 너 무조건 처리한다!”“클럽에서는 여왕이라면서! 오늘은 어디 한번 노예가 되어 봐!”...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온다연은 옆의 경호원한테 얘기했다.“핸드폰은요?”경호원이 핸드폰을 꺼내 온다연에게 줬다.온다연은 슬쩍 보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저 사람 건가요?”“네.”경호원이 답했다.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얘기했다.“이 핸드폰으로 영상 촬영하고 올려요. 증거는 남기지 말고요.”“증거는 남지 않을 겁니다. 납치를 한
임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뭐겠어요. 당연히 바이러스죠. 치료가 안 되는 그런 거요!”온다연은 시선을 드리우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죽이지 말고 잘 살게 내버려 둬.”임정아는 그녀의 무표정한 모습에 혀를 찼다.“마음이 이렇게 차가운 줄 몰랐는데,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유강후가 그렇게 엄하게 감시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일을 꾸밀 수 있다니!”“쯧쯧, 우리가 협력관계인 게 참 다행이네요. 다연 씨를 노엽힌 적은 없으니까요.”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시선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감정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원을 끄지 않았으니 유강후가 곧 찾아올 거야. 가자.”이때 그 경호원도 안에서 나와 나지막이 말했다.“발송했습니다.”온다연: “휴대폰은?”경호원: “다시 넣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장갑을 끼고 있어서 흔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잘했어요.”몇 사람은 다시 차에 탔고, 두 대의 SUV는 오던 길을 따라 나갔다.하지만 2분도 안 되어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온다연의 얼굴색이 변했다.“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지?”임정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내가 생각한 것보다 십여 분이나 빠르네요. 내일 아침의 뉴스 헤드라인은 또 내 차지가 될 거 같아요.”온다연은 밖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 이렇게 노출되면 네 연예인으로서의 삶은 끝장날 거야. 일단 넌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이 숲을 지나서 밖으로 빠져나가. 반 시간이면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여기에 남을게.”“유씨 가문의 세력은 굉장히 커서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올 거야. 심지어 무장한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니 빨리 도망쳐서 최대한 그들을 피해.”임정아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혼자 여기서 잘 대처할 수 있겠어요?”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녀를 납치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보러 온 것뿐이잖아. 게다
안윤희는 옆 거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고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심에게 다가갔다.“이모, 저는 이모부랑 강 대표님에게 차 한잔 가져다드릴게요.”그 시각 안심은 방금 손에 넣은 핑크색의 다이아몬드 팔찌를 온다연에게 채워주며 끊임없이 예쁘다고 칭찬했다.그녀는 안윤희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뜸 물었다.“윤희야, 이거 어때? 유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안윤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는 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건 동국 왕비가 차던 팔찌였는데 불과 얼마 전 경매에 나와 70억의 고가에 낙찰되었다.모든 여자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팔찌를 안심이 갖고 있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평범한 선물인양 딸에게 건네는 그 모습을 보고 질투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안윤희는 진유나만 없다면 이 모든 게 본인의 소유라고 생각했다.‘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앞길을 막는 거야.’‘차라리 그냥 확 죽어버리지...’안윤희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유나는 이모 닮아서 예쁘잖아요. 뭘 차든 다 잘 어울려요.”그 말을 들은 안심은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들어 안윤희를 바라봤다.“아참, 경매에 사파이어 귀걸이도 나왔어.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한 쌍 샀는데 집사님한테서 가져가.”안윤희는 눈을 내리깔았다.“고마워요, 이모. 저는 차 우리러 갈게요.”‘고작 사파이어 귀걸이로 내가 물러날 것 같아?’‘이거 받고 떨어지라는 느낌인가?’안윤희는 반드시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 시각 작은 거실.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말도 없이 청혼이라뇨?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가요?”유강후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태연하게 말했다.“유나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진수현은 버럭 화를 냈다.“장난도 정도껏 해야죠,”그는 문 쪽을 힐끗 보고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유나는 아직 모르니까 당장 그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해서 가져가요. 괜히
‘그러니까 하루 종일 날 속였다는 거야?’‘아니, 설마 며칠 동안 속인 건가?’온다연은 최근 들어 지루 할때마다 유강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온갖 보기 싫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고 방에 아무도 없을 땐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설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강 대표님, 사실 며칠 전부터 다 보였죠? 날 속이는 게 재밌어요?”눈물을 그렁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선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울지 마요. 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온다연은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우리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권이 밖에서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병문안 오셨습니다.”진수현과 안심이 찾아왔다.온다연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창턱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다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왔잖아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온다연은 잽싸게 선방을 날렸다.“강 대표님, 저한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티 내지 마세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저 다음 달에 약혼해요. 오늘은 강 대표님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되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약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왠지 모를 살의가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주먹에는 서서히 핏줄이 튀어 올랐다.진씨 가문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조금씩 단서를 얻었다.온다연은 정말 이곳에 약혼자가 있었다.그리고 그 상대의 성은 박, 이름
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은 자신이 예전에 그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유강후는 평범한 잘생김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잘생겼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한들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그였다면 싫을 건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안된다. 곧 약혼하게 될 사람으로서 낯선 남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올바른 행동이다.사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등 뒤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한숨을 쉬는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가 뒤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유강후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부딪혔다.유강후는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감쌌고 온다연은 순식간에 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때마침 붉은빛 노을이 두 사람 위로 늘어졌고 어느새 그들 사이에는 모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마치 평생 서로에게 얽혀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마음이 심란해진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솔직히 이제 다 보이는 거죠?”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됐어요. 어차피 보이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내일부터 저는 오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간병인을 보내줄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유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있던 점은 그녀에게 물려 하얗게 변했다.유강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온다연, 내 허락 없이 이렇게 깨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예전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네요?”염지훈과 진수현이 얘기해준 적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다연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국에 온 이후로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강 대표가 이를 알고 있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 후, 더 이상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그저 온다연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밀려왔지만 참아야만 한다.만약 온다연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면, 비참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녀의 용서를 얻어야 할지 몰랐다.결국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시간이 유일하다.온다연은 아무 말 없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아직 그리움 속에서 허덕이는듯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혔다.“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그분... 저랑 많이 닮았나요?”‘그렇게 많이 닮았나?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네.”그 한 글자에는 유강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밀려와 너무 괴로웠다.‘얼마나 사랑하면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걸까?’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최소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유강후는 예상보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었다.그의 상태를 들은 곽혜진은 또 이상한 약을 보내왔다. 유강후는 이를 복용했고 둘째 주에 곧바로 시력을 회복했다.다만 온다연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된 뒤로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못 보는 척 연기를 이어갔다.제일 고생하는 건 그의 연기에 맞춰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다.때마침 이권이 서명할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문을 열어보니 유강후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다가서자 유강후는 곧바로 싸늘한 눈빛과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나가.’하지만 지금 당장 서명해야 될 중요한 서류였기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이권은 중요한 사항이라며 여러 번 손짓했지만 유강후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온다연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창틀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 바다를 바라봤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손까지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워지자 온다연은 대뜸 눈을 부릅뜨며 유강후를 밀어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유강후는 태연하게 답했다.“이렇게 부축하면 오히려 제가 더 불편해요. 그냥 손잡고 가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정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온다연은 그가 안 보이는 척 연기하는 건가 싶어 손을 들어 유강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다른 한 손까지 잡고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형체 정도는 보이니까 흔들 필요 없어요. 아직 완전히 눈이 먼 수준은 아니거든요.”온다연은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민망함이 밀려와 곧바로 그를 끌고 식탁으로 향했다.진씨 가문의 셰프는 한국인이었다. 유강후는 음식들이 입맛에 맞는지 삼계탕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온다연은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그를 지켜봤다.‘먹을 때는 꽤나 우아한데 왜 매번 행동은 제멋대로 하는 거지?’그녀는 유강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봤다.‘잘생긴 건 인정. 그런데 뭔가 제정신이 아닌 느낌이랄까?’참다못한 유강후가 그릇을 내려놓고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쳐다볼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곧바로 반박했다.“안 보인다면서요? 제가 강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의 말투에는 애정이 묻어났다.“앞이 안 보여도 유나 씨가 계속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건 느껴져요. 본능적으로 그냥 느낌이 온달까?”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온다연은 괜스레 당황함을 감췄다.“계속 안 봤거든요?”그녀는 시계 상자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선물이에요.”유강후는 상자를 더듬다가 열어보더니 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에 뭔가를 알아챘다.“시계?”그러자 온다연은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림을 선물했잖아요. 저도 답례를 해야될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선물만 꿀꺽하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거든요.”유강후는 다이얼을 만져보며 무브먼트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
유강후는 흠칫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그러자 이권이 답했다.“솔직히 돌봐달라고 얘기했을때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간병인을 보냈어도 되는데 직접 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도련님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유강후는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으나 여전히 동국 왕자가 신경 쓰였다.‘세기말 감성도 아니고 뭔 왕자야. 어이가 없네. 다연이한테 딴마음 품으면 죽여버릴 거야.’곰곰이 생각하던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집사가 방금 얘기한 동국 왕자, 설마 연씨 가문 후계가 중 한 명이야?”이권이 답했다.“연시온 씨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쌀쌀맞았다.“그 사람이었구나. 유능한 건 맞는데 연씨 가문에는 후계자가 될 후보가 너무 많아서 아마 순위에도 못 들 거야. 가서 경고해. 다연이한테 치근덕거리면 연씨 가문의 후계자에서 제명해 버린다고.”“아시다시피 말레이시아 해상 유전 개발업체는 현재 저희와 연씨 가문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연씨 가문에서는 차기 후계자로 연시온 씨를 지명했고 이번 유전 개발 관련한 모든 사항도 전적으로 그분이 책임지고 있습니다.”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신국의 사업과 투자보다 훨씬 큰 유전이기에 그래서 당분간은 미움을 사지 않는 게 좋을듯합니다.”앞이 안 보일 뿐 유강후의 예리한 통찰력은 변함없었다.“잠깐만, 이건 처음부터 다연이를 위해서 준비한 프로젝트였잖아. 그럼 앞으로 다연이가 연시온이랑 컨택한다는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지?”“연시온에게 다른 일거리를 던져줘. 그럼 연씨 가문에서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담당자를 바꿀 거야. 이런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이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씨 가문의 세력도 만만치 않거든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답했다.“로운한테 맡겨. 정 안 되면 연씨 가문의 주식을 우리가 먹어 치우고 내가 직접 하면 되잖아.”“말레이시아
“이 집사님, 저희 대표님이 지금 앞이 안 보여서 많이 예민해요. 말이 거칠어도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이권은 두툼한 가죽 가방을 꺼내 집사에게 건넸다.이를 본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전 이런 거 못 받습니다. 강 대표님한테 그 어떤 불만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권은 가방을 강제로 그의 손에 쥐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실은 이 집사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집사는 여전히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습니다.”“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큰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닌데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집사님한테는 쉬운 일입니다.”“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거죠? 최대한 돕겠습니다.”이권은 병실 문을 힐끗 쳐다보고선 나지막이 말했다.“알다시피 저희 대표님이 최근에 실명해서 기분이 안 좋은 편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유나 씨에 관련한 일인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봤을 땐 저희 대표님이 유나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집사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사실 진유나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를 보는 사람마다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를 사로잡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유나 씨가 동국 왕자랑 저녁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집사님도 저랑 같은 일을 하는 입장이라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사람이 중간에서 비위를 맞추는 게 제일 힘들잖아요.”“그래서 말인데, 유나 씨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줄 수는 없을까요?”집사는 기겁했다.“안 됩니다. 회장님이 알게 되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그러자 이권이 차분하게 타일렀다.“대표님은 이성으로 유나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유나 씨가 연애할 생각은 있는지, 아니면 결혼 계획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한 거예요.”“만약 두 분이 잘된다면 이 집사님은 분명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손에 시계 상자를 든 채 쏜살같이 달아났다.진씨 가문 저택의 접대실.진수현은 동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과 함께 내년 협력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동국은 작은 크기에 비해 해상 자원이 풍부해서 가장 중요한 국제 항로와 해협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진씨 가문과는 오랜 세월 협력해 왔고 매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온 사람은 동국의 미래 황실 후계자인 연시온이다. 그는 대범하고 유능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진수현도 가문의 후계자를 그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안으로 들어선 온다연은 메인석에 앉아 있는 진수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뭇사람들을 보았다.그녀가 들어서자 진수현은 흐뭇한 얼굴로 손짓했다.“여긴 내 딸이자 미래 진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진유나예요. 인사들 나눠요.”연시온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였다.온다연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 하나 걸치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도 안 했는데 그 얼굴과 분위기는 미인대회 우승자보다 더 아름다웠다.특히 그녀의 하얀 피부는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유난히 더 반짝였다.연시온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진씨 가문에서 후계자를 찾았다는 얘기는 이미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진수현 부부에게 꽁꽁 감춰져 그동안 아무도 후계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한때 동남아 일대에서는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훼손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는 루머가 돌았다.그러나 현실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미모의 여인이었다.안심의 복제판인 수준이다.외모로만 따졌을 땐 안심이 훨씬 더 뛰어났지만 진유나에게서는 소유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매력이 느껴졌다.단언컨대 승부심이 강한 남자라면 이런 여자에게 승부욕을 느끼기 마련이다.온다연은 연시온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협상이 절반 이상 진행된 때에 온다연이 더해지면서 예정보다 시간이 더
온다연은 불순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욕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서자 마침 집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강 대표님이 보낸 선물입니다. 사과의 의미로 보냈다는데 한번 열어보시죠.”온다연은 곧바로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 들어있는 건 뜻밖에도 해바라기 유화였다.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의 이 유화는 거장 모비크가 전성기 시절에 그린 걸작으로, 예전에 자가드 경매에서 160억의 고가에 낙찰됐다.이 그림은 모비크가 자신의 딸과 아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원래는 두 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불에 타버렸고 남은 하나가 유일무이한 작품이 되면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다.온다연은 줄곧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해바라기를 꼽았다. 게다가 그녀의 우상인 모비크의 작품이니 보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결국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선물을 받았다.입을 맞춘 거에 대해 뺨을 때렸으니 그 일은 정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본인 때문에 눈을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조금 들었고 선물까지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잠시 고민한 후 걸음을 옮기더니 진수현의 수집실로 걸어가 값비싼 골동품 시계 하나를 골랐다.그녀가 시계 상자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시계는 안심이 진수현에게 준 선물이었고 그들 부부의 사랑을 입증하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진수현한테 그 시계는 대대로 물려줄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미래 사위에게 선물하려고 지금껏 아껴뒀다.염지훈도 이 시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진수현에게 여러 번 암시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사실 진수현은 매번 온다연에게 물었는데 그때마다 온다연은 명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그러던 그녀가 예상치 못하게 스스로 이 시계를 꺼냈다.안심의 시선을 눈치챈 온다연은 어설프게 시계 상자를 뒤로 숨기더니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이 비싼 그림을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