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들었어? 쟤가 잠자리하는 걸로 사범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대. 저 치마도 어쩌면 그렇게 받은 건지도 몰라.”“진짜 웃겨. 잠자리하고 겨우 짝퉁을 받았어?”“징그럽고 더러워. 수미 씨는 왜 이런 쓰레기를 우리 곁에 앉혔어? 짜증나게.”...온다연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극도로 혐오스럽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걸상을 뒤로 힘껏 당겼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스가 가득 담긴 컵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빨간 주스가 치마에 뿌려져 지저분해졌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온다연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무릎에서 전해지는 심한 통증을 참으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았다.유하령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천박한 년’이라고 말하고는 중지를 내밀었다.이때 아무 말도 없던 유강후의 할머니가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고 뭐해? 이 아이는 왜 계속 이렇게 덤벙대는지? 미진아, 너 시집온 지 몇 년 됐는데 아이가 아직도 이 모양이니? 망신스러운 바보짓만 하고 다녀.”얼굴이 빨개진 심미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빨리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다시 오지 마. 창피해 죽겠어.”온다연은 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으며 절뚝절뚝 홀에서 나갔다.하지만 그녀는 방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계단 뒤편의 창고로 끌려갔다.쾅 하고 문 닫는 소리에 이어 그녀는 바닥에 내던져졌고, 미처 일어나기 전에 따귀가 연거푸 날아왔다. 그녀는 머리가 윙윙 울리고 아프다 못해 약간 저렸다.“천한 년, 누가 널 오라 했어? 감히 우리 삼촌 차에 타? 뻔뻔한 년! 네 이모랑 똑같이 천박해.”온다연이 일어나려고 허우적대자 유하령은 그녀의 손등을 밟았다.하이힐은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온다연은 너무 아파서 시선이
온다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거즈를 가져다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서 왼손으로 큰 반창고를 들고 왼쪽 귀 뒤쪽의 두피에 붙이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겨우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상처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소염제 두 알을 삼켰다. 이렇게 맞은 적은 처음이 아니었고, 회가 거듭되다 보니 이렇게 스스로 약을 바르는 것도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쪼그려 앉아 장판 밑의 나무 마루를 뜯어 비닐로 코팅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 두어 장이었는데, 어머니의 사진은 그녀의 손길이 닿아 다소 흐릿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다듬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엄마, 너무 아파요!”사진의 비닐 커버는 눈물에 젖었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그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온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온다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대문 밖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비교적 뒤쪽에 있어 평소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늘 모두 앞 홀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하인들 역시 모두 그곳에 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온다연은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창고로 가서 작은 삽을 하나 들고 후원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으로 갔다.익숙한 길이라, 그녀는 곧바로 물건을 묻어둔 곳을 찾아내어 삽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곧, 작은 놋쇠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막 떠나려는 순간, 옆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못 걷겠어. 술 마시니까 어지러워...”나은별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나무 숲길에 나타났다. 이곳은 유강후의 방으로 가는 필수 통로였다.‘나은별이 취해서 유강후의 방에 가려는 것일까?’달빛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온다연은 숨을
달빛 아래, 온다연은 유강후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외모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차가운 눈매, 높고 오뚝한 콧날, 매혹적이고 얇은 입술, 칼로 새긴 듯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 깊고 차가운 눈은 언제나 냉정한 기운을 풍겼다.‘정말 잘생겼네! 그러니 항상 여자들이 추파를 던지는 거겠지!’온다연이 멍해 있는 순간, 유강후는 이미 시선을 돌리고 뒤쪽에 손짓했다.“권아, 나은별 씨 좀 데려다줘. 술을 많이 마셨어.”나은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강후 씨, 나를 보내려는 거야?”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너 취했어. 가서 푹 쉬어.”이때, 이권이 다가와서 말했다.“나은별 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나은별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돌아가.”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강후 씨, 보고 싶을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온다연은 그녀의 그 말을 엿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달빛 아래 두 연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핑크빛 분위기가 감도는 두 사람을 보며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 후, 유강후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은별이 뒤를 두 번, 세 번 돌아보며 걸어갔다.나은별이 떠난 후, 유강후는 뒤돌아보지 않고 온다연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무심코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온다연은 긴장해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유강후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나와!”유강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있어 마치 방금까지 나은별과 부드럽게 대화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서 너를 끌어내야겠어?”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예절은 배워야 해. 며칠 뒤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거야.”온다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알겠어요.”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짓씹더니 덤덤히 말했다.“따라 와.”곧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독채로 향했다.온다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 알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무슨 뜻일까?따라오라니? 그의 독채로 간다는 말인 걸까?몇 걸음 내디뎠지만 온다연이 따라오지 않자 유강후는 걸음을 멈추고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안겨서 가고 싶어?”온다연은 화들짝 놀랐지만 감히 걸음을 옮길 수는 없었다.유씨 일가 사람들은 모두 본관 쪽에 있고 오직 유강후만이 독립된 별장에서 살았다. 두 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백 평에 달하는 그곳은 그가 가끔 돌아와서 지내는 곳이었다.게다가 집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하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아마 나은별뿐일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집사가 매일 낮마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하러 그 별장에 간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의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그곳에 간다면 유강후와 단둘이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그러기 싫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몸을 돌려서 다시 돌아왔다.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겨우 몇 걸음 만에 온다연의 앞에 섰다. 그는 온다연이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아갔고 온다연의 놀란 시선 속에서 성큼성큼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상자를 빼앗긴 온다연은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감히 시끄럽게 굴 수는 없었기에 다급히 유강후의 뒤를 따랐다.이내 그들은 유강후의 별장 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온다연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문 앞에서
이때 온다연은 이미 상자를 잡은 상태였다. 무거운 강철 문이 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엄청난 통증이 전해지는 순간, 온다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상자를 꼭 쥔 채로 서둘러 그것을 몸 뒤로 감추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녀가 겨우 상자 하나 때문에 팔을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소리를 들으면 꽤 심하게 다쳤을 텐데 말이다.그러나 온다연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상자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유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얇은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환한 조명 아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유독 날카롭게 보여 쉽게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그곳에는 문이 있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도망치기만 해봐!”한없이 차가운 목소리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더니 본능적으로 발을 거두어들였다.유강후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리 줘 봐.”온다연은 유강후가 상자를 보겠다고 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 쳤고 결국엔 비싼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에 등이 닿았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유강후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온다연의 작고 가녀린 몸이 그의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엄청난 압박감에 온다연은 몸을 움츠렸다. 가구와 한 몸이라도 될 듯이 말이다.유강후에게서 나는 삼나무 향이 온다연을 완전히 감쌌다. 온다연은 그의 향기가 호흡을 통해 폐까지 가득 들어찬 뒤 온몸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에서 싹을 틔울 것 같기도 했다.온다연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향기를 맡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 전 문에 부딪혀 팔에 빨갛게 움푹 파여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살갗이 까지고 멍이 파랗게 들어있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소파에 던져졌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온다연은 주우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움직이면 지금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겠어.”그러자 온다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유강후가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유강후가 바다에 던지겠다면 정말 던질 것이다.온다연이 가만히 있자 유강후는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내 소파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며 말했다.“앉아.”온다연은 그 작은 구리 상자를 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상자를 바다에 던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 손을 들어봐.”온다연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그녀는 옅은 파란색 잠옷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고 하얀 팔뚝만 드러났고 다소 보수적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비추자 수정처럼 맑고 윤기가 났다.하얀 피부 때문에 다친 곳은 더 아찔하게 보여졌다.유강후는 이미 파랗게 멍든 곳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아파?”온다연의 관심은 온통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녀는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아까 맞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안 아픈 건가?’유강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흙이 조금 묻은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말했다.“또 쳐다보면 버리겠어.”온다연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보고는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유강후는 상처가 난 곳에 소염제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았다.약을 바를 때 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고 손도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붕대를 감았고 시선은 그 반창고에 멈췄다.일반 반창고보다 조금 크고 귀여운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양복 첫 번째 단추를 살짝 풀었다.양복 단추마저 어떤 재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질감이 좋은 양복이었다. 그래서 온다연은 혹시나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그의 양복을 벗겼다. 그러자 실크 질감의 흰색 줄무늬 셔츠가 나타났다.셔츠 밑단을 정장 바지에 넣었기에 그는 어깨가 더욱 넓어 보였고 허리가 잘록해 보였다. 그의 몸매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이 좋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차갑게 생겼고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그는 더욱 고상해 보였다.온다연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벌려 온다연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강후의 어떤 터치에도 온다연은 매우 민감하게 느껴졌고 그에 따라 거부감도 컸다.넥타이를 풀자마자 온다연의 손은 급하게 움츠러들었고 넥타이를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갈아입은 옷은 욕실 문 앞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두면 매일 사람이 와서 수거해 갈 것이야. 그쪽에 가도 마찬가지야.”‘그쪽에 간다고?’온다연은 살짝 멍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 몸에 있는 물건들은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일찍 물건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오늘 한 말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감히 묻지 못했기에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너무 씻은 나머지 하얗게 된 잠옷에 머물렀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심미진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밖에서 집을 빌려 살고 아파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옷이 낡아서 이렇게 되어도 버리
온다연은 초조해서 땀이 났고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따라 위층으로 걸어가며 시선은 줄곧 그의 손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맴돌았다.그러나 그녀는 유강후가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다시 상자를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온다연은 문밖에 서서 유강후가 상자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것까지 보았다.다급해진 온다연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깨물고 있었지만 또 감히 유강후의 방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구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상자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처음에는 유하령이 가져갈까 봐 두려워서 땅속에 묻었는데 지금은 또 유강후의 손에 들어갈 줄은 전혀 몰랐다.유강후는 유하령보다 백 배 이상 무서운 사람이었다.온다연이 밖에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유강후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들어와.”온다연은 자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엉겁결에 계단을 쳐다보았다.이곳은 계단까지 대략 7, 8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좀 빨리 뛰면 1분 이내에 이 집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온다연은 방으로 들어갔다.유씨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정원 전체가 통일된 중국식 디자인이었고 심플하고 절제된 분위기 속에 호화로움이 넘쳤다.유강후의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넓은 침실에는 심플하고 큼직큼직한 중국식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땅은 옅은 색의 나무 바닥이었고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면 고급 원목의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유강후의 침대는 매우 컸고 그 위에 옅은 회색 침구가 깔려 있었다. 고귀하고 차가운 색상이었다. 꼭 마치 유강후라는 사람처럼 냉기가 차 넘쳤다.반쯤 걸어간 온다연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바로 침대 옆에서 어두운 눈빛으로 서 있었는 유강후를 본 그녀는 두려웠다.애써 잊어버린 기억들이 아련하게 다시 얽히면서 온다연은 전에 없던 위험을 느꼈다.하지만 온다연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도망가려 하지도 않았다.온다연은 그 상자를 돌려받아야 했고 심지어 꼭
“지훈 씨, 미안해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훈 씨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요. 솔직히 약혼 날짜를 미룰까도 고민해 봤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훈 씨는 그저 저한테 가족이나 오빠 같은 사람...”“듣기 싫으니까 그만해.”염지훈은 거칠게 말을 자르고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 너 진짜 잔인하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널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왜 유강후는 등장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는 건데? 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흔들리냐고. 도대체 왜?”온다연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은 깬 건 그녀가 맞았기에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질책해도 말없이 그걸 견뎌야만 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내 마음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야?”고통을 이기지 못한 염지훈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온다연은 재빨리 그를 말렸다.“지훈 씨, 이러지 마요.”그러자 염지훈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그냥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어? 예전의 온다연은 어디 갔냐고. 돌려내. 돌려내라고.”“내가 아는 말 잘 듣고 착한 온다연은 다른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그런 여자가 아니야.”그는 힘껏 온다연을 밀쳤다.“넌 온다연이 아니야. 나가.”“나가라고.”뒤로 밀려난 온다연은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곧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적시고 나서야 염지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는 온다연을 안아서 소파에 앉힌 뒤 약상자를 찾아와 지혈해 주려고 애썼다.그런데 온다연이 그를 제지했다.“됐어요. 지훈 씨가 더 심하게 다쳤잖아요. 제가 해줄게요.”온다연은 연고와 붕대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피투성이 된 손을
유강후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꺼져.”가장 소중한 걸 잃은 듯한 괴로운 느낌이 또다시 밀려왔고 그는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경호원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유강후를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눈에 비친 유강후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따로 없었다. 평소 단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래 그룹의 대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이때 유강후가 대뜸 물었다.“두 사람...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저희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선을 지키는 분입니다. 아마 염 대표님과의 약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유강후의 곁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그들은 두 사람이 어떤 풍파를 겪었는지 전부 지켜봤다. 더욱이 지난 3년 동안 유강후가 보낸 힘든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그러기에 그에게 온다연이 어떤 존재인지는 더없이 잘 알고 있다.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편하게 지내지 못할 테니까.그 시각 별장 안.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염지훈은 온다연을 덥석 끌어안았다.온다연은 몸부림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껴안도록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염지훈의 힘은 점점 더 세졌고 마치 그녀를 몸속으로 밀어 넣을 듯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이제 됐어요?”염지훈은 그녀를 놓아주더니 잔뜩 지쳐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아, 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예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염지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왜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염지훈은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계속하여 현실을 부정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질 정도였다.“말도 안 돼. 내가 떠난 지 얼마 됐다고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 심지어 저 사람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어?”온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염지훈은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떠오른 게 아니라면 유 대표랑은...”“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잠깐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요?”그러자 염지훈이 답했다.“나 근처에 사니까 그쪽으로 가자.”염지훈이 지내는 곳은 불과 이곳에서 몇백 미터 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앞장선 염지훈의 뒤에는 온다연이 있었고 유강후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염지훈은 돌아서서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곤 했다.극도로 어색한 분위기나 한참이나 이어졌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과 비슷한 거리를 두었다.별장에 다다르자 염지훈은 유강후를 가로막았다.“그쪽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서...”그러자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염 대표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한 거예요. 잊지 마요.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그쪽이니까.”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염지훈의 손에서는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당장이라도 유강후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였다.“무슨 낯짝으로 다연이의 곁에 있는 거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연이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까요?”“강 대표님이 바꿔치기...”“닥쳐.”분노를 이기지 못한 유강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염지훈의 손목을 잡았다.“상황을 이용한 비열한 놈이 누군데 감히 날 탓해?”“나랑 다연이 사이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우리 둘이 해결할 거야. 너 같은 제 3자가 끼어들 곳은 없어.”제 3자라는 말은 염지훈의 분노 버튼을 눌러버렸다. 결국 그는 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쓰레기 같은 놈. 너랑 네 가족들이 다연이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야.”온다연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린 덕분에 주먹은 유강후에게 떨어지지 않았다.“지훈 씨, 얘기할 생각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염지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저 인간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염 대표?”‘염지훈이 왜 여기에 있지?’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비꼬는듯한 어조로 말했다.“레스토랑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새로운 부인과 오붓한 데이트라도 하고 계셨나?”유강후의 시선은 그를 넘어 온다연에게 향했다.온다연도 염지훈을 본 게 분명하다.그녀는 일어나서 가볍게 입을 열었다.“지훈 씨.”부드러운 목소리에 염지훈은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아섰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다연이?”온다연은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맞아요.”염지훈은 시선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물렀고 여전히 이곳에서 온다연을 만나게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정말 다연이야?”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러자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염지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매섭게 노려봤다.“또 그쪽이네요. 어떻게 찾았어요?”유강후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눈에 적의가 번쩍였다.“다연이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염 대표님이 제멋대로 숨겼잖아요. 어떻게 감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지훈은 분노하며 달려들더니 유강후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짐승만도 못한 게 무슨 낯짝으로 다연이를 찾아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넌 다연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유강후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주먹을 맞았다.그러고선 달려드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물러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움직이지 마.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원한이야.”그 말에 경호원들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유강후는 외투를 벗어 차에 던지더니 곧바로 주먹을 날렸고 염지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냈다.두 남자는 실력이 엇비슷해서 싸우기만 하면 목숨을 걸었고 잠깐 사이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온다연은 싸움이 점점 심해지자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곧바로 경호원에게 붙잡혔다.
어느새 온다연의 뒤에는 건장한 경호원들이 나타났다.한눈에 봐도 굉장히 강하고 전문적인 티가 났기에 남자들은 당황한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가 누군지 알아? 경고하는데 한국인이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거든.”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여기서 사람 때려도 돼요? 강 대표님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겠죠?”경호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장 이곳에서 죽이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습니다.”그러자 온다연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저 인간들이 다시는 누굴 괴롭히지 못하게 불구로 만들어줘요.”“알겠습니다. 사모님.”곧 주차장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조명이 어두워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온다연은 시끄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입 막아버려요.”“알겠습니다.”곧 그들은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바닥에서 꼼짝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앞으로 나서서 그중 한 명을 걷어찼다.“앞으로 또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거예요?”남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아니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온다연은 여전히 싸늘했다.“경찰서로 가서 자수해요. 지금까지 괴롭혔던 사람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털어놓아요. 안 그러면 내가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온다연이 손짓하자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왔다.“저 사람들을 경찰서 입구에 버려줘요.”“알겠습니다.”그 후 온다연은 여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어디 아픈 곳 없어요?”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건 익숙하니까... 고마워요.”온다연은 두통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쩌면 이런 장면이 너무 익숙해 자신이 예전에 겪은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거예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염지훈은 허탈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여긴 북아메리카잖아. 다연이가 있을 리가 없지...”출국이 금지되어 온다연과 약혼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생각하니 권예진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염지훈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권예진을 바라봤다.“출국 금지된 건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염지훈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염지훈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넋을 잃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도 나왔다.그는 멍해 있는 온다연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이때 권예진이 룸에서 나왔고 그녀는 유강후를 보고선 흠칫했다.‘낯이 익은데... 누구지? 오늘 아침에 봤던 잡지 표지의 인물이랑 비슷해 보이는데...’‘옆에 있는 여자도 낯이 익네?’권예진이 생각에 잠긴 찰나 유강후는 이미 온다연과 함께 떠났다.그녀는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온다연이 누군지 알아차렸다.염지훈 사무실에 놓인 사진 속의 그 여자다.재빨리 뒤쫓아가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아래층에 도착해 막 차를 타려던 찰나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발신자 번호를 보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전화 받고 갈 테니까 차에서 기다려요.”온다연이 차에 오르자마자 옆에 있던 차에서 남자 세 명이 내렸고 그들은 어떤 여자를 끌어내리더니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다.여자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었지만 그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하여 주먹과 발길질을 했다.한국어로 말했기에 온다연은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했다.세 남자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며 여자를 모욕했고 듣기 거북한 말을 끊임없이 퍼부었다.이런 장면들이 꿈
염지훈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권예진, 너 왜 이렇게 뻔뻔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꼭 이래야만 속이 후련하니?”권예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염지훈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끌어다가 태연하게 먹었다.“먹을 땐 언제고 배부르니까 버리려고요?”그 말에 표정이 싸늘해진 염지훈은 경고하듯 나지막이 말했다.“약 탄 사람 너지? 권예진, 기회 줄 때 솔직하게 말해. 약 탔지?”권예진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염지훈을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추잡스러운 인간으로 보여요?”염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맞잖아.”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은 권예진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감정을 숨겼다.“아빠가 지훈 씨를 잡으라고 한 건 솔직하게 인정할게요. 하지만 절대 약을 타지는 않았어요. 누군가 어젯밤에 저한테도 약을 탔다면 믿으실래요?”염지훈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그러고선 수표 한 장을 꺼내 권예진에게 던졌다.“하룻밤에 20억이면 충분하지? 부족하면 말해.”권예진은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격 떨어지는 행동은 그만해줄래요? 박씨 가문보다 못한 건 맞지만 이깟 돈으로 모욕당할 만큼 부족하지는 않으니까.”“그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 밥 먹자고 한 거예요. 책임지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3개월 동안 회사에서 일 배우기로 아빠랑 약속했어요. 3개월이 되면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떠날게요.”염지훈은 여전히 싸늘했다.“아니. 내일 당장 돌아가. 능력이 뛰어나서 돌려보냈다고 내가 직접 연락해서 설명할게.”권예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엄마가 남겨준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무조건 3개월을 채워야 해요. 안 그러면 전부 다 내연녀한테 준다고요.”권예진은 눈물을 머금은채로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빌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절대 눈에 띄지 않
빛을 등지고 앉은 탓에 유강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의 일을 알게 되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지금도 이렇게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요.”온다연은 투덜거렸다.“강 대표님이 온 이후로 매일 안 좋은 꿈을 꿔요. 예전에 무슨 일 있었죠? H국에서 지낼 때 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알려줘요.”“전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넘쳤거든요. 그 꿈들이 진짜라고 생각할 때마다 아프고 괴로워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그 침묵은 마치 꿈속의 일들이 현실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불안함을 느끼며 진지하게 물었다.“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이라는 거죠?”애써 괴로움을 감춘 유강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유나 씨의 곁에는 제가 있었거든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이 평생 기억을 되찾지 못하기를 바랐고 상처입힌 일들은 그저 과거 속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두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무리 나쁜 기억이라도 그건 추억이잖아요. 강 대표님의 말대로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다면 더 잊어서는 안 되죠.”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고 지그시 눈을 바라봤다.“솔직하게 말해봐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게 맞죠? 거짓말하면 안 돼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큰손으로 온다연의 머리를 잡더니 곧바로 입을 맞췄다.유강후의 키스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았고 마치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입술과 얼굴, 그리고 귓볼에 입을 맞췄다.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하면서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마치 작은 고양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운 그의 행동은 스트레스받은 감정과 과거의 고통을 어루만졌다.그의 차분한 감정과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온다연의 초조한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숨 막힐듯한 키스가 이어지
“괴롭힘당하는 꿈을 꿔요. 그것도 매일. 정말 나한테 있었던 일인가요? 방금 저 남자... 어떤 사람이에요?”유강후는 온다연을 꼭 껴안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은 조금씩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먹었으면 이만 돌아갈까요?”온다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았다.“싫어요. 강 대표님은 왜 매번 피하기만 해요? 이런 질문할 때마다 어떻게서든 자리를 뜨려고 하잖아요.” 온다연의 유강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누군지 알려줘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아야 하잖아요.”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지금은 유나 씨의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네요. 나중에 기분이 풀리면 알려줄게요.”“싫다고요.”온다연은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났고 다시 그 광고를 보려고 창가로 달려갔다.광고비가 엄청나게 높은 터라 아무리 유명한 브랜드라도 장시간 반복적으로 홍보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극심한 두통이 밀려온 온다연은 광고 한두 개를 보더니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곧바로 유강후를 향해 돌진했다.“왜 가만히 있어요? 누군지 알려달라고요. 누구냐고요.”그 남자는 온다연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인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다연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히 진실이 눈앞에 있는 대로 알 권리조차 없는 현실에 그녀는 점점 통제 불능의 작은 짐승처럼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강 대표님은 다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는 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에요. 제발 알려줘요. 저 남자가 누군지 알려달라고요.”눈물 범벅된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위로해야만 했다.“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유나 씨한테 저 사람과 매우 닮은 친구가 있었어요. 둘은 다른 사람이에요.”유강후는 그 남자가 주희인걸 알아봤다.얼굴에 손을 댔는지 이제는 주한과 매우 비슷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이곳에 데려온 걸 후회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