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욱현이 담현아의 말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새해 때도 그는 소년처럼 우리 집에 눌러앉아서 설을 쇨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딱히 과한 행동도 안 했고 나름 잘 지냈다.하지만 담현아의 걱정하는 모습에 그냥 따라 나가기로 했다. 콘서트장 출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최욱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저와 함께 게임을 하시겠어요?”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넸다. 담현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 봐야 해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할게요.”담현아는 나를 잡아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욱현은 그냥 철없는 애야.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담현아는 동의하며 말했다.“무섭진 않죠. 그냥 미친놈이니까!”담현아는 최욱현에 대해 좋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웃으며 물었다.“혹시 욱현이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적이 있어?”그 말에 담현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한겨울에 담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최욱현이 사람을 죽이는 걸 봤어요.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수아 언니, 그 녀석은 순진한 척하는 게 특기예요.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다 그를 싫어하죠! 지금까지 프랑스 왕실의 비호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그러니 언니도 그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담현아의 표정을 보니 정말 최욱현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욱현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말하지 않았다.굳이 설명하자면 같은 어머니를 뒀다는 것뿐이었다.나와 담현아가 헬기를 타려고 할 때, 최욱현이 뒤쫓아 왔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수아야, 어디 가?”담현아는 내 팔을 꽉 잡았다.나는 헬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그 여자가 많이 아프대요. 그래서 지금 F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나를 낳아 준 엄마는 신부전증이었다. 그리고 그 병은 내 탓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나에게 신장을 하나 줬으니까.신장이 하나밖에 없으면 신부전증에 걸리기 쉬웠다.석지훈은 내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동의했다. “그래. 정우 씨랑 같이 가. 난 어르신을 뵙고 F국으로 너 데리러 갈게. 그다음에 같이 운성으로 돌아가자.”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욱현이가 여기 있어요.”나: “...”석지훈은 침묵했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빠.”“그래. 네가 결정한 대로 해.”“그럼 F국에서 기다릴게요.”석지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최욱현에게 말했다.“가자. 내 헬기 타고 가.”담현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그녀는 당부했다.[그 사람을 조심해요.]헬기가 이륙하자마자 석지훈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그는 좀처럼 하지 않던 당부를 했다.[최욱현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너랑 어머니 관계 때문에 널 특별 취급하진 않을 거야. 윤아야, 정우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안 그럼 F국에 가도 널 바로 못 찾을 수도 있어.]담현아도 걱정하고 석지훈도 걱정했지만 눈앞의 최욱현은 전혀 해가 없어 보였고 예전에도 딱히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다.기껏해야 날 납치했다가 풀어준 것뿐이었다.그렇긴 해도 나는 마음속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석지훈은 침대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시간도 채 못 잤는데 여자 친구가 F국로 가버리다니.최욱현.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그는 유럽 전체에서 큰 세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어서 항상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게다가 작년에 석지훈이 사업에 실패했을 때, 최씨 가문은 그 틈을 타 세력을 키웠다. 최씨 가문은 석지훈과 진유겸에게는 눈엣
F 국의 초봄은 따뜻했다. 헬기에서 내리자 따스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외투를 벗었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 내리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가 안에서 기다리셔.”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병원에 안 계시는 거야?”최욱현은 씩 웃으며 설명했다.“어머니는 개인 주치의가 있거든.”나는 일단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최욱현은 성 주변을 지키는 석씨 가문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수아야, 뭘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핑계를 댔다.“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을 당해서 크게 다쳤거든. 그래서 요즘 외출할 때 조심하는 거야. 너를 경계하는 건 아니야.”나는 최욱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거대한 성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성에 가정부가 없어?”최욱현은 내 옆에서 함께 걸으며 설명했다.“별로 없어. 어머니와 알랭, 두 사람만 살아.”나는 다시 물었다.“알랭?”“네 계부. 이 나라의 공작이셔.”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등급이었으니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지위였다.그나마 엄마는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성에 도착해서야 나는 ‘별로 없다’라고 말한 최욱현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넓은 거실에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2층 복도에도 열 명이 넘는 가정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있었는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옷 같았다. 게다가 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나는 복도에 서 있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최욱현을 따라 F 국에 온 걸 후회하며 당장 여길 벗어나고 싶었다. 최욱현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최욱현은 내 손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방은 50평 정도로 아주 넓었다.방
“괜찮아. 약으로 버티면 된대.”그녀가 말했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은 비록 창백했지만 꽤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와 약속했었어. 우리 둘이 다시 만나는 건 죽고 난 뒤라고. 이제 그가 나보다 먼저 떠났으니 지금의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것뿐이야. 내 바램이기도 하지.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문득 운산 정상에 있는 그 비석이 떠올랐다.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있다.‘인연이 다시 이어질 때 부디 당신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를’그녀는 내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또한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그리고 내가 그 신장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마음 깊이 감춰져 있던 그녀의 사랑을 깨닫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내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최욱현에게 말했다.“욱현아, 알랭이 곧 도착할 거야. 그와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먼저 수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구경 좀 하고 있어. 30분 후에 다시 오렴.”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편찮은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 결국 나 때문에... 나로 인해 시작되었고 결과도 내가 이렇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최욱현은 무심하게 물었다.“그게 전부야?”나는 촉촉해진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내 목숨은 그녀가 준 거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넌 어머니가 목숨을 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야? 그럼 어머니가 원하는 건 단지 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말이야?”“넌 어머니의 딸이고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예전에 나에게 신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네 신념은 뭔데?”내가 물었다.그는 한때 신념이란 ‘목숨’이라고 했다.평생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그는 대답하지 않고 평소답지 않게 침묵했다.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엘
부패하는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코를 막아도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욱현은 냄새가 좋으냐고 묻다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무슨 냄새야?”최욱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노인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며 계속 F 국어로 말했다. 나는 F 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최욱현에게 물었다.“이 사람, 네가 여기에 가둔 거야?”“어. 잘못을 저질렀거든.”최욱현의 말투는 담담했다.나는 다시 물었다.“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여기에 가둔 거야?”최욱현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흰 천을 벗겼다. 천 아래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신장처럼 보이는 모양의 물건이 담겨있었다.보기에도 역겨웠다.속이 뒤틀려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물었다.“내 물건이 있다고 했잖아. 뭐가 있는데?”최욱현은 나와 신장을 번갈아 봤다.나는 충격에 빠져 물었다.“설마...”“이건 너의 예전에 망가졌던 신장 두 개야. 내가 가져왔지. 이 일은 어머니도 몰라. 하지만 난 널 위해 계속 보관하고 있었어. 사실 훨씬 전부터 널 만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엄하게 감시했어. 내가 네 삶을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거든.”어쩐지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했다.나는 결국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계속 토하는 나에게 최욱현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많이 힘들어?”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너 정말 역겹다.”적출된 내 장기를 직접 보게 하다니...그 생각을 하니 더 심하게 토했다.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었다. 최욱현은 내 옆에 서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점심에 먹었던 것을 다 토해내고 나니 담현아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최욱현은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 잔인하다고 했다.그렇다면 그 부패한 냄새는...나는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그리고 급히 영어로 물었다.“영어 할 줄 아세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악마예요!”최욱현은 그가 말하
최욱현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나는 거부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뜨고 말했다.“그 손으로 날 건드리지 마!”나는 그에게 명령했다.“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그때 최욱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최욱현은 F 국어로 말했고 상대방의 대답도 F 국어였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최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나를 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내 신념은 어머니였어. 내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평생 지켜주는 거였다고. 그런데 수아야, 난 방금 어머니를 잃었어.”‘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우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 20분도 안 됐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나는 순간적으로 슬픔에 잠겼다.나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최욱현은 내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주셨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어 준 유일한 사람이거든.”말을 마친 최욱현은 황급히 달려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결국 나는 그를 쫓아갔지만 길을 잃고 말았다.그렇다, 나는 지하 통로에서 길을 잃었다.지하 통로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무리 걸어도 계속 통로 안이었으니까.나는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10년 동안 포르말린에 담가 놓은 그 신장과 그 노인을 다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절망에 빠졌다.그때야 비로소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나는 급히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장 먼저 석지훈이 떠올랐을 뿐, 현정우가 나와 가장 가깝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윤아야?”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그는 부드럽게 물었다.“윤아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지하에서 길을 잃었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욱현이가
수아에게 쓴 편지였고 편지를 쓴 사람은 안혜인이었다.이것은 나의 친어머니가 나에게 쓴 편지였다.그러나 봉투는 매우 낡았다.마치 오래전에 쓰여진 것처럼.나는 침대 곁에 앉아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사랑하는 수아야, 안녕.네가 태어난 지 9일째 되는 날이구나.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절망 속에서 본 유일한 빛이란다.사랑한다, 아주 아주 많이.네 아빠보다 훨씬 많이 사랑해.하지만 나는 직접 너를 키울 수 없구나.미안하다, 널 네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만 해서.수아야, 나는 네 아버지를 운성에서 만났단다.비가 계속 오는 날이었지.처음 만났을 때, 네 아빠는 엄청 차갑고 말도 없었어. 나한테 말도 잘 안 하고 맨날 빈정대고 무시했어. 그런데 다행히도 엄마가 엄청 쫓아다녔지. 안 그랬으면 아빠랑 인연도 없었을 거야.그랬을 거야...갑자기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네...수아야, 난 네 아빠 진짜 많이 사랑했어.진짜 진짜 많이.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엔 그이가 석씨 가문 사람인 줄도 몰랐고 너 갖기 전엔 아내랑 애가 있는 줄도 몰랐어.비록 나한테 최고로 잘해 주겠다고 했지만 난 자존심이 세서 다른 여자랑 아빠를 나눠 가질 수 없었어.수아야, 엄만 너무 슬퍼.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속임수를 당한 것 같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모든 것이 한낱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어...수아야, 엄마한텐 이제 너밖에 없단다.오직 너 하나뿐인데.너를 보내야만 하는구나.그건...너는 석씨 가문의 혈통이지만 상속받을 자격이 없단다. 너보다 위에 세 명의 오빠가 있기 때문이지. 근데 우린 그런 거 필요 없어. 내가 나중에 너한테 석씨 가문 못지않게 다 줄 테니까.엄마를 믿으렴. 내가 꼭 그렇게 해 줄게.하지만 엄마는 너를 F 국에 남겨두고 싶지 않구나.엄마가 성공하려면 주변에 위험한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거든.엄마는 네가 평안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란다.그리고 석씨 가문은 네게 가장 좋은 안식처가 될 거야.그래서
편지를 읽고 나니 나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네가 내 딸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구나.”사실 그 말은 나에게 일부러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그녀는 나와 친해져서 서로 얽히는 걸 싫어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슬퍼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나를 멀리하셨고 조금 전까지도 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나는 엄마의 깊은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급히 아까 방으로 돌아갔다.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한 그 노인에게 나는 영어로 물었다.“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아세요? 아시면 제가 지금 당장 모시고 나갈게요!”나는 엄마를 만나러 가야 했다.지금 당장.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어로 대답했다.“알아요.”나는 썩은 냄새를 참으면서 휠체어를 밀고 그를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말린에 담긴 10년 전에 망가졌어야 할 내 신장 두 개는 쳐다보지 않았다.최욱현은 정말 변태였다.노인의 정신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영어로 나를 재촉했다.“아가씨,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난 그녀를 만나고 싶어요... 내가 제때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그녀를 잃을까 봐...”그는 아마도 나의 엄마를 말하는 것 같았다.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욱현이는 당신이 예전에 우리 엄마를 항상 때렸다고 했는데 지금 엄마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할 자격 있어요?”그는 놀라며 물었다.“아가씨가 그녀의 딸이라고?”“네, 저는 그녀의 딸입니다.”이번 생에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었다.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나는 그녀가 내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했어요. 나는 당시 젊어서 화를 참지 못했죠! 게다가 부부 사이에 다툼은 흔한 일이 아니겠어요? 나는 당신 어머니를 때린 적이 있지만 당신 어머니는 자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
나는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성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계속 널 찾고 있어. 며칠 후에 심리 상담을 받아보게 하려고 해.”나는 힘겹게 대답했다.“현성이가 절 기억하지 못해요.”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고 있다는 거지?“계속 수아를 찾고 있어.”그는 나를 잊었으면서도 내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그 말을 듣자 마음이 저려 왔다.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내가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고정재는 다시 말을 이었다.“그냥 현성이 정신 상태랑 내 계획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리고 굳이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차피 지금 네 곁에는 지훈 씨가 있잖아. 현성이한테 더 이상 마음을 쏟을 이유는 없어.”고정재는 언제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을 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저도 선은 지킬 줄 알아요.”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더 이상 고현성과 엮여서는 안 된다는 걸.그런데도...그 오만했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슴 한구석이 답답해났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 방안에 틀어박힌 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도 석지훈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그는 늘 그랬다. 밖에 있을 때면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말이다.그때 원태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만나서 한잔 하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약을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한밤중, 담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아 언니, 나 맞았어요. 물론 나도 한 대 때리긴 했지만.”나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물었다.“누구한테?”“고민영.”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어쩌다 싸운 거야?”“태웅 오빠랑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에 나가려는데 우연히 고민영이랑 부딪혔어요. 처음엔 쿨하게 괜찮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끝까지 깐죽거리면서 날 모욕했어요. 그래서 나도 못 참고 한마디 했죠. 솔직히 싸울
아이스랜드의 눈보라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최희연은 몸을 움츠리며 조용히 말했다.“전... 자격이 없어요.”눈앞에 서 있는 이 순수한 남자를, 마치 풍경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이 남자를...그녀는 감히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열등감이었다. 전에 그가 말했던 한마디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희연 씨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게다가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복수뿐이었다.왕자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어차피 앞으로의 시간은 많았다. 남은 시간은 수십 년이나 되지 않는가.수십 년의 세월이라니, 그는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이전처럼 혼자가 아니라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그와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부인.그는 이 단어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내일 병원에 함께 가서 흉터를 치료하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들을 초빙했습니다. 희연 씨의 얼굴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줄 거라고 약속하더군요.”그 말을 듣자 그녀의 어두운 눈동자가 한순간 빛났다.왕자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회하진 않나요? 그때 저와 함께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분을 기다리겠다고 했던 선택을.”5년 전.왕자현은 우연히 운성시에 들렀다가 그녀를 만났다.그때 그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를 숨겨주고 돌봐준 사람이 바로 최희연이었다.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다.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최희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진서준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왕자현이 떠나던 날,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희연 씨, 저랑 함께 아이스랜드에서 살겠어요? 평생을 약속할게요.”그때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었지?그녀
“미쳤거나 바보가 됐거나 아니면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됐다고 할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갖지 못하는 남자가 잘되는 건 절대 못 보죠.”나는 소리쳤다.“미친년.”나는 그녀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곧바로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빠르게 고현성의 행방을 찾아내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나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현성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심지어 얼굴에는 깊게 베인 흉터까지 남아 있었다.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분노에 차서 물었다.“임지혜는?”“가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잡아뒀습니다.”나는 눈이 붉어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데려오세요.”그 순간, 병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고현성이 깨어났다.나는 급히 병실로 들어갔다.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나를 보자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낯선 환경이 불안한 듯 늘 강하던 그가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나는 화가 났다.아니, 화를 낼 기력조차 없이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가 과거에 내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생각하면 분명 난 그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그런데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이... 누구예요?”순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네 이름이야”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제가... 고현성이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기억하는 건 뭐야?”그는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불안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그쪽은 누구예요?”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난... 네 친구 수아야, 연수아.”그렇게 부르는 게 맞겠지.나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펴보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