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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1화

작가: 십일
재석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때, 동생아? 맛있지?”

“네, 맛있어요...”

소진헌은 기분이 좋아지더니,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많이 먹어! 그리고 이 소고기도 먹어 봐. 내가 직접 만든 소스에 찍어 먹으면...”

재석은 줄곧 몇 마디 말만 반복했다.

“맛있네요, 향기롭네요, 정말 특별하네요, 여태껏 먹어본 적이 없네요...”

그래서 소진헌은 더욱 신이 났다.

밥을 다 먹은 뒤, 재석은 일어나서 작별을 고했다. 이 순간, 그는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소진헌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은아, 가서 네 재석 삼촌 좀 바래다줘.”

재석은 심신이 지쳤다.

“네!”

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의 도수가 높았기에, 그녀는 지금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반응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했고, 눈빛도 무척 맑았다.

재석을 문 앞으로 데려다준 다음, 밖으로 나가자마자 뒤의 문이 바람에 날려 펑 하는 소리를 냈다.

사실 배웅할 것도 없었다, 재석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으니까.

정은은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뭘 잘못 먹었는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 재석 삼촌.”

재석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그윽하여 마치 깊이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와 같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오며 또박또박 말했다.

“방금 날 뭐라고 부른 거야? 응?”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위험이 담겨 있었다.

정은의 귀에 떨어지자. 마치 찌릿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남자의 눈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초, 2초.

5초가 지나서야 정은은 정신을 차렸다.

어색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취한 건지, 정은의 볼에 홍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점차 퍼지더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맑고 새까만 정은의 두 눈은 마치 샘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순수했다. 입술을 깨무는 동작과 함께 수줍은 기색이 점점 떠올랐다.

“미, 미안해요... 나, 나도 왜 그렇게 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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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쏟아지는 겨울비에 J시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무더운 여름은 가고,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싸늘한 바람이 찾아왔다.정은은 두꺼운 패딩과 모자, 목도리로 자신을 꽁꽁 싸맸다.도겸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렇게 추운 날, 그는 차를 골목 맞은편의 길가에 세워놓고 스스로 아파트 아래에 가서 기다렸다.지나가는 행인들은 저도 모르게 도겸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문을 바라보며 경건함이 경지에 이르렀다.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그는 도겸을 보았다.물론 도겸도 재석을 보았다.눈이 마주치자, 두 남자의 눈빛은 모두 적의를 드러냈다.재석은 도겸에 대해 호감이 없었고, 심지어 현빈조차 도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별장에 가서 책을 옮길 때, 도겸이 정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재석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강 대표님은 아침에 금방 온 거예요, 아니면 어젯밤에 가지 않은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웃었다.“교수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자꾸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금방 왔든, 아니면 밤새 안 갔든,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도겸은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가 내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함께 외출할 거예요.”재석은 바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은이 최근 실험실의 일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리니, 양자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재석은 생각을 멈추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정은이 이번 만남에 동의한 이상, 다 자신의 생각이 있겠죠.”‘데이트'는 바로 ‘만남’으로 되었다.누가 방금 교수님이 말을 잘 못한다고 무시했을까?“남자라면, 가난할 수도 있고 못생길 수도 있지만, 매너가 없어서는 절대로 안 돼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여성을 존중하고, 그녀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31화

    “낮에는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저녁에 좀 더 뛰어야지.”정은은 제자리에 서서 재석이 올라오길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함께 올라갔다.“오늘 선배님이 도와준 덕분에 우리도 바로 쫓겨나지 않았어요.”그러나 재석은 오히려 손을 흔들었다.“우리 사이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 5일이면 충분한 거야? 부족하면 내가 다시 학교에게 연락해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게...”“이미 충분해요.”이번 문제는 시 소방국과 관련이 된 데다가 시정지시서까지 발부되었기에 정은 그들도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총장이 나서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조만간 이사를 가야 하는 이상, 굳이 재석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선배님은 이미 날 여러 번 도왔어.’두 사람이 동행하면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갔다. 분명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7층까지 올라갔다.“선배님, 잘 자요. 내일 봐요.” 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보자.”정은이 문을 닫고 나서야 그도 따라서 닫았다.서재에 들어간 재석은 컴퓨터 앞에 앉았고, 화면이 켜지자 진욱의 문자가 ‘분출’되었다.[너 어디 갔어? 왜 얘기하다가 문자를 씹는 건데?][설마 또 조깅하러 건 아니겠지?][아니... 너 오늘 밤 몇 번이나 내려갔잖아? 대체 왜 그래?][조 교수? 귀신에 빙의라도 된 거야?][헐! 정말 달리기를 하러 갔다니. 길가에 무슨 금덩어리라도 있는 줄 알겠다.][오늘 밤 정말 수상해. 밤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하룻밤에 몇 번이나 나가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어.][너 혼자 좀 봐, 7시부터 10시까지 몇 번이나 내려간 거야?!][됐어... 데이터는 그냥 나 혼자 맞출게. 널 기다린 내가 바보지!]다급한 진욱은 마지막에 포기를 하며 묵묵히 일하러 갔다.재석은 방금 여자애가 혼자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노란 등불이 몸에 떨어지자,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30화

    “아악!” 진호는 발을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리고 뛰면서 꽥꽥거렸다.정은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 미안해. 방금 손이 좀 미끄러워서. 하지만 넌 낯가죽이 두꺼우니 이런 일로 다치진 않을 거야, 안 그래?”민지도 몸을 돌려 책상 하나를 안았다.그렇다, 그녀는 책상 하나를 맨손으로 들었다.뚱뚱해도 나름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힘이 센 것이었다.진호는 멍하니 민지를 바라보았다. “너, 너 뭐 하려는 거야?”“물건 옮기고 있잖아.”말을 마치면서 바로 진호를 향해 던졌다.진호는 아픈 발조차 돌보지 못하고 바로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책상은 그가 방금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미 기절했을 것이다.“너, 너희들...”‘감히 물건을 던지다니? 어쩜 이렇게 비겁한 거야!’“미안, 좀 지나갈게.”줄곧 입을 열지 않던 서준은 재빨리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진호의 다른 한쪽의 발을 세게 밟았다.“아, 미안!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안경을 깜박했네. 나 방금 무슨 쓰레기를 밟은 거야?”민지는 정색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쓰레기는 회수할 수 있지만, 네가 밟은 그 물건은 쓰레기만도 못해. 회수해도 더러워서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너희들 정말 하나같이 사납군! 오늘 이 물건들 다 옮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청소부 불러서 전부 옮기라고 할 거야!”진호는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을 호되게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뒷모습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민지는 배를 안고 크게 웃었다.“야, 능력 있으면 가지 마! 돌아와, 나 아직 물건을 다 옮기지 못했단 말이야!”웃고 나니 기분은 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아직 5일 남은 줄 알았는데, 이제 하루도 안 남았다니.”서준도 안색이 어두웠다.“정말 괘씸해!”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구석에 가서 어디론가에 전화를 했다.“선배님,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점심을 먹은 후, 청소부들이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29화

    말을 마치고, 정은은 학교로 들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나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너에게 있어 난 그렇게도 형편이 없는 건가...”정은은 먼저 수업하러 갔다.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민지, 서준과 함께 실험실에 갔다.5일 후면 그들은 실험실을 학교에게 돌려줘야 했다.그들은 마감 기한 전에 제1단계의 실험 데이터를 완성하고 싶었다.그러나 세 사람이 실험실에 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청소부 몇 명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민지가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했죠? 이건 저희의 물건인데, 어디로 옮기시려는 거예요?!”그들도 당초에 이 실험실을 장식하느라 엄청난 신경을 썼다.물건도 함께 사고, 청소도 함께 하고. 그들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물건을 옮기다니, 누가 가만히 있으려 하겠는가?아무튼 민지는 제대로 화가 났다.“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라고요!”청소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그들도 억울했다.“학교에서 물건을 옮기라는 통지가 내려왔거든요.”정은은 그나마 냉정했다.“누가 통지를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지혜 교수님이요. 이 실험실이 소방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후속 시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옮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옮기라고 하셨어요.”“또 그 빌어먹을 송 교수님이야!” 민지는 이를 갈았다.“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내고 싶은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밉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사람이 교수님으로 될 자격이 있는 건가?’청소부는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요, 학생들. 우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정은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곧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죠.”“그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28화

    정은은 생각 끝에 동의했다.도겸이 사인할 거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도겸은 웃으며 핸드폰을 왕순자에게 돌려준 후, 유쾌한 발걸음으로 올라갔다.왕순자는 핸드폰을 받으며 감탄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웃으신 게 얼마만이야.”...새벽, 정은은 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평소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베갯머리에 놓인 핸드폰은 끝없이 윙윙거렸다.그녀는 눈을 억지로 뜨며 확인했는데, 전부 도겸이 보낸 문자라는 것을 발견했다.연달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낸 것도 모자라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었다.[정은아, 자?][어젯밤에 네 꿈을 꿨어][아직도 자는 거야?][오늘 아침에 수업 있어?][서정이 수업시간표 확인했는데, 너희들 오전에 전공 수업이 하나 있더라.]이와 같은 쓸데없는 문자였다.정은은 차갑게 읽으며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가 귀찮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또 하나의 문자가 들어왔다.[정은아, 나 네가 좋아하는 떡 샀는데, 지금 네 집 아래층에 있어.][조급해하지 마, 계속 널 기다릴게]정은은 눈살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먹을 것을 들고 아래층에 서 있었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남자는 뭔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도겸은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이 탁 하고 창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정은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물론 편하게 자지 못했다.하지만 아침 이맘때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편했다.아침 7시, 그녀는 제시간에 일어나 세수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겸은 정은을 보자마자 눈빛이 밝아지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정은아, 이 떡과 만둣국은 네가 예전에 자주 갔던 그 가게에서 산 거야. 하지만 지금 좀 식었으니까 전자레인지로 데워야 할 것 같아.”“난 이미 집에서 먹었으니까 이건 너 혼자 먹어.”도겸은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래, 그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27화

    “하하하, 그건 아니지만 나름 경험이 있는 편이에요.”“한번 듣고 싶네요.”이세운은 도겸의 옆에 앉아 유유히 입을 열었다.“옛말에 ‘집에 여자가 있어야 집안이 잘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집에 있는 여자는 내조를 잘 해야 돼요. 우리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며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좋아요.”“접대할 때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나가면 돼요. 술도 대신 막아줄 수 있고, 또 손님을 잘 모실 수 있으니까요. 끝나면 작은 돈을 써서 보내면 되고요.”“사모님은 의견이 없으신 거예요?”“집사람이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매일 큰 별장에서 지내며, 명품 가방에 고급 화장품을 쓰잖아요.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심지어 나가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불만을 느낄 리가 있을까요?”도겸이 물었다.“만약 어느 날 사모님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신다면...”“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는 돈 많은 남자에게 의지하면 점차 혼자 생존할 능력을 잃을 거예요.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날겠어요?” 이세운은 자신의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만약 날개가 있다면요? 정말 날아갔다면요?”이세운은 멍해졌다.‘이건...’그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도겸은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대표님, 너무 자신 있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왜냐하면...”이세운은 영문을 몰랐다.“앞으로 뼈 저리게 후회할 수 있으니까.”말을 마치고 도겸은 골프카트에 올라탔다.“계속 즐기세요, 전 먼저 돌아갈게요.”“네?”...골프장을 떠난 도겸은 원래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신에 홀린 듯 서비대학교로 찾아갔다.이번에 그는 대문 앞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길 건너편에 멈춘 다음, 차창을 내리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통해 도겸은 교문을 바라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6년 전 그대로였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정은을 처음 본 곳이 바로 여기였다.그녀를 본 순간, 도겸의 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26화

    재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셨다면서요? 오늘은 꽤 일찍 돌아오셨네요.”“들었다고요?” 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들었죠?”그는 오늘 수업이 있었는데, 마침 생명과학대학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 민지와 서준밖에 없었다.물어보니 정은이 휴가를 냈다는 것이었다.실험실은 확실히 매우 바빴다. 평소에 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바로 돌아갔기에, 이 시간에 집에 가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은에게서 들은 거겠죠.”재석은 쌀쌀하게 말했다.“그럼 정은이는 골목 어귀에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 적이 없는 건가요?”“바로 가야죠.” 현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페달을 밟고 떠났다.잠시 후, 현빈은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렸다.방금 재석이 정은을 다정하게 ‘정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재석은 시선을 돌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만 이를 악물고 있는 동시에 눈빛도 싸늘해졌다.7층에 도착하자, 그는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정은아?”몇 초 후, 문이 열렸다.“네, 선배님.”재석은 위아래로 정은을 한번 훑어보았다.“괜찮아?”“네?” 정은은 멍해졌다.“오늘 교실에서 널 보지 못했는데, 네가 휴가를 냈다고 해서.”“네.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요.”“실험실과 관련이 있는 일이야?”“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됐어?”정은은 담담하게 웃었다.“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어요.”“내 도움이 필요해?”“아니요.”현빈의 말이 아주 옳았다. 도겸이 스스로 사인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강요할 수 없었다.재석은 눈빛이 반짝였다.“방금 요 앞에서 심현빈을 만났어.”“아, 심 대표님이 날 데려다줬어요.”“같이 간 거야?”“아니요.”정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공교롭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25화

    “썰렁해서 웃긴 거야.”‘참 긍정적인 사람이야.’현빈은 웃음을 거두며 갑자기 정색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굳이 강도겸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요?”“네가 강도겸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같이 앉아서 그 사람과 밥을 먹겠어? 부탁할 일이 있으면 몰라도.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래?”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강도겸이 사인한 동의서를 받아야 수속을 마칠 수 있는 거야?”“네.”“아무나 찾아서 사인해 주면 안 돼?”정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에헴!” 현빈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농담이야.”“난 돈과 비준을 받는 일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나에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얘 사인 안 했어?”“네.”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무슨 조건을 말했는데?”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겠지? 두 사람 다시 시작하자고.’‘이 사람이 테이블 밑에 숨어서 엿들은 거야?’“쳇! 뻔뻔스럽긴! 화해는 무슨,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같은 부류의 사람이라서 이런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가?’“난 마음속으로 뭘 중얼거리고 있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아, 내가요?”“분명히 있을 텐데!” 현빈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난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필요 없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맞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닐 거야! 몰래 날 욕한 거 아니겠지?”“에헴, 그건 아니에요...”“방금 그 땅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동쪽의 교외에요.”“위치는 좋네. 시내에서 멀지 않고 교통도 편리하고. 헤어질 때 강도겸이 준 거야?”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왜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이건 정말 까다롭네. 강도겸을 억지로 강요해서 사인하게 할 수도 없고. 그러나 방법이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야.”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방법이 있어요?”“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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