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연은 자꾸만 허가은의 인생을 자신이 빼앗는 느낌이 들었다.본인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허연후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잠깐이 아니라 이제부터 쭉 그래도 되니까 눈 감아 봐. 오빠가 이야기 들려줄게.”“진짜요? 그럼 어린 왕자 듣고 싶어요.”“그래. 영문 버전으로 들려줄게.”“네네. 영문 버전이 더 재미있어요.”허연후는 핸드폰을 꺼내 영문 버전의 어린 왕자를 찾아서 그녀에게 들려줬고 방안에는 금세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순간 하지연은 지금 마치
허연후의 물음에 허가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에 얼어버렸기 때문이다.순간 예전의 그 허연후가 아니라는 느낌에 혹시나 그가 이미 뭔가 알아챈건 아닌지 걱정되었다.하여 허가은은 버벅거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오빠, 왜 그런 눈빛으로 봐? 난 그저 간호사들이 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뭐가 이상해?”허연후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니, 원래부터 남의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오지랍을 부리기에 놀라서.”“나랑 지연 씨가 동갑이잖아. 그리고 같은 심장병을 앓고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동병
거실 광경을 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연후야, 우리를 왜 급히 오라고 한 거야? 그리고 아픈 가은이는 왜 데리고 왔어? 병원에 며칠 더 입원시키지 않고?”허연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사건의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요?”말을 마친 허연후는 민태구의 곁으로 가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입가에 머금은 냉소는 마치 비수처럼 민태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민태구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서더니 말을 더듬었다.“도련님, 이건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 벌인 일이에요. 도련님은 아가씨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시겠
허가은은 친자 보고서를 낚아채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말도 안 돼. 내가 왜 아저씨의 딸이야? 난 허씨 가문의 큰딸이고 엄마 아빠의 딸이잖아.”허연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몰라? 그날 너, 내가 하지연의 엄마와 하는 대화를 듣고 하지연이 어릴 적 여동생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잖아. 바로 그날 저녁에 하정국이 하지연을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어. 너는 그 핑계로 하지연을 보러 병원에 찾아가서는 지연이의 지갑 속 어릴 때 사진을 보고 내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이랑 똑같다는 걸 알았겠지. 그
“그래도 다행히 양어머니가 지연이를 잘 키워주셨어요. 어려운 형편에서도 지연이 그림도 그리게 해주셨고. 그래서 이화여대 미술학부에 일 등으로 합격했는데 심장병 때문에 휴학 중이에요. 할아버지, 지연이 어릴 때와 똑같아요. 마음씨도 착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양보하고. 이번에 심장이식 수술을 했는데 아직 진실을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이 사실은 알리지 못했어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허씨 가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몇 년 동안 줬던 사랑이 허가은 이라는 가짜를 향한 거였다니.그들의 핏줄은 밖에서 온갖 고초를
허가은은 허연후를 떠나면 죽을 정도로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지만 이미 진실이 밝혀진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허가은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앞으로의 일은 차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허가은이 짐을 챙겨 위층에서 내려오자 가족들 모두 허연후의 휴대전화에 있는 하지연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허순철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너무 비슷하구나. 어릴 적 가은이와 똑같아. 정말 너무 어리석게도 우리가 사람을 잘못 데려왔구나.”금사락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했다.“불쌍한 우리 딸. 고생을,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바르게 잘
허연후는 웃으며 말했다.“우리 지연이 정말 멋지네. 앞으로 무조건 우수한 미녀 화가가 될 거야.”허연후가 ‘우리 지연'이라고 말하자 하지연은 기분이 좋은 듯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허 선생님,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사람은 허 선생님과 지혜 언니예요. 두 분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야, 날 믿어. ”“네, 허 선생님을 믿어요. 그런데 허 선생님, 아까 여동생을 데리고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왜 또 왔어요?”허연
얼굴을 본 하지연은 놀라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허가은은 침대에 천천히 앉아 하지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목소리에는 말 못 할 아픔이 배어 있었다.“지연아, 넌 그 도박꾼의 딸이 아니야. 넌 허씨 가문의 아가씨야. 그때 오빠가 널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네가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거야. 내 친아빠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서 나를 허씨 가문의 아가씨로 보낸 거였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의 총애를 받으며 지냈어. 그들 모두 날 사랑해 줬어. 지연아, 미안해
그가 접근하자 허나연의 심장은 쿵쿵 뛰었고 그 하얀 얼굴도 점점 뜨거워졌다.어린 시절 단순했던 감정도 어느새 맛이 변해 버렸다.차유라가 육천우를 바라보던 눈빛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큰거렸다.그들은 지난 3년 동안 함께 일했다.육천우가 그녀와 연락이 줄어들었던 것도 옆에 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허나연은 화가나 육천우를 발로 걷어찼다.“나를 건드리지 말고 유라 씨한테 가.”뾰로통한 허나연의 모습을 본 육천우는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아직도 질투하는 거야?”“내가 무슨 질투를 해. 우리 집이 식초 공장을 하는 것도
허나연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네, 알았어요. 하지만 의사 진료에 협조하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세요.”이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본 차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좋아. 너희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말을 듣고 수술을 받을게.”육천우는 농담조로 말했다.“저의 아내가 말 한마디로 스승님이 수술을 받으시게 했네요, 나연이의 능력을 새삼 새롭게 보게 되네요.”애정 어린 눈빛으로 허나연을 바라보던 육천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 있는 차유라를 본 차 교수는 입술을 살짝 치켜올렸다.“됐어
수표를 받아 쥔 차유라의 손가락은 새하얗게 변했고 가슴은 간간이 쿡쿡 찌르는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차유라는 아버지 덕에 육천우 마음속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 전에 그는 혼약이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차유라는 가련한 눈빛으로 육천우를 바라보았다.“천우야, 나연 씨랑 결혼 할 거야?”육천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유라 씨의 뜻은 저랑 천우가 감정이 하나도 없는 정략결혼이기에 언젠가 헤어질 거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죠? 제 말 맞죠?”“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왜냐하면 외
허나연은 어릴 때부터 말싸움으로 육천우를 이긴 적이 없다.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한 그녀는 조수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이모, 천우 오빠가 또 저를 괴롭혀요.”조수아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이따가 천우에게 밥을 주지 말고 굶기자. 자신이 못생겼다는 것을 모르다니, 우리 나연이가 천우보다 백배는 예뻐, 제일 예뻐.”허나연은 육천우를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네가 못생긴 거야.”육천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네. 그렇게 나연이 응석을 항상 받아주세요, 앞으로 결혼한 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저한테 고자
이 소식을 들은 육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며칠 전 스승님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데 왜 그때 이 일을 언급하지 않으셨지?”차유라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가 알게 되면 BM 투자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까 봐 아버지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아버지께서는 네가 그의 제일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길 바라고 있어.”육천우가 ZERO 그룹을 인수한 직후 유럽발 금융위기를 겪고 있을 때 금융 전문가인 차 교수의 도움 덕에 여러 투자 프로젝트에서 부활할 수 있었으므로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고 있
방금 누그러졌던 허나연은 다시 조롱을 받고 놀라서 육예람의 입을 틀어막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제발 그만 좀 말해. 네가 마음에 들었던 가방을 사줄게.”육예람은 웃으면서 허나연의 볼을 꼬집었다.“비밀 하나에 차 한 대와 가방 하나를 맞바꾸는 건 너무 실속 있는 거래야. 다음에 무엇을 뜯어낼지 고민해 볼 테니 반드시 꼭 나한테 미리 말해줘.”육천우는 다가가 육예람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꿈 깨!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연이랑 할 말 있으니 자리 좀 비켜줘.”화가 난 육예람은 눈을 부릅뜨고 육천우를 노려보았다.“
육천우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차림에 목에 잇는 단추 두 개를 풀어헤쳤다.그는 보일 듯 말 듯 한 붉은 자국을 허연후가 발견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육천우의 쪽을 향했고 허나연은 놀라서 온몸이 굳어졌다.만약 허연후가 어젯밤에 육천우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들을 결혼시킬 수도 있었다.허나연이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데 육천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연이가 물었어요.”육천우의 한마디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조수아와 육문주는 이 말을
육예람이 허나연을 잡고 구석구석 살피려는데 육천우가 목 뒷덜미를 잡아끌며 말했다.“헛짓거리하지 말고 가서 아줌마한테 아침 좀 차려달라고 해. 나연이 아직 밥도 안 먹었어.”“오빠, 아파요. 돌아오자마자 왜 나만 괴롭혀요? 나중에 아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네 고자질이 무서웠다면 아마 난 오늘까지 살지도 못했을 거야. 어릴 때부터 아빠한테 고자질하는 걸 좋아했잖아. 아빠만 아니었다면 넌 벌써 나한테 크게 뚜드려 맞았어.”육천우가 육예람의 머리를 몇 번 세게 문지르자 육예람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오빠! 머리 방금
허나연은 급히 방으로 돌아와 어제 입었던 치마를 입으려 했지만, 도저히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육천우가 그녀의 치마를 찢었던 장면이 떠올랐다.분명히 천천히 풀 수도 있었는데 마음이 급했는지 육천우는 힘으로 치마를 찢어 버렸다.‘이제 어떡해. 옷도 못 입을 정도로 다 찢어지고!’허나연은 화가 나서 치마를 육천우에게 내던지고 말했다.“다 너 때문이야. 멀쩡한 치마를 네가 찢어 버렸잖아. 이제 뭘 입고 돌아가? 만약 내가 예람이와 같이 자지 않았다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면 뭐라고 설명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