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으로 가서 서류 좀 가져다 줘. 그리고 옷장에 있는 자주색 넥타이도 좀 부탁해.”“네, 알겠습니다.”고은영은 공손히 대답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차키 좀 빌려줘. 대표님 집으로 좀 가봐야 해!”“대표님도 참, 평소에 집으로 심부름도 자주 보내면서 업무용 차 한대도 안 뽑아 주다니!”안지영은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차키를 꺼내 고은영에게 건넸다.차키를 건네 받은 고은영은 담담히 대답했다.“서류만 가지고 나올 거야. 차비 받으면 나중에 너 다 줄게!”“요즘 기름값 엄청 비싸다고! 그깟 차비 얼마나 준다고!”안지영이 투덜거렸다.그녀는 예전부터 회사의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배준우는 짠돌이 중의 짠돌이었다.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내 사비로 기름 한번 넣어줄게.”“매달 대출로 400만원이나 갚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그러니까 좀 도와줘.”“불만도 얘기하면 안 돼?”안지영이 뾰로통하게 말했다.고은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이 재벌 아가씨는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배준우가 짠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사실은 그냥 회사에 불만이 많은 거였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은영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녀는 배준우의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블랙톤 위주의 인테리어는 적절한 소품들로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은영은 일단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긴 뒤, 익숙하게 옷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그런데 장롱 문을 열자마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고은영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하지만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포장지도 안 뜯은 콘돔이었다!줄곧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그것을 도로 장롱에 넣었다.평소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배 대표가
나태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그와 함께 조사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나태웅이 귀찮은 듯이 말했다.“이제 일하자!”“네, 나 실장님!”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나태웅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배준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온 고은영은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휴게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이러다가 정말 크게 사고 한번 칠 것 같아!’무슨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지 나태웅은 한 시간 뒤에야 배준우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그가 나오자 마자 고은영의 업무용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표 사무실 쪽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냉랭한 눈빛과 마주쳤다.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네.”“들어와!”남자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음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연 순간, 벌써 풍겨져 나오는 숨막히는 압박감에 그녀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달했다.“대표님, 다음 회의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서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그 무심한 동작에 고은영의 긴장감은 다시 고조되었다.배준우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점점 더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꼈다.한참이 지난 뒤, 그녀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을 때, 배준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까 뭘 봤지?”“아니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고은영은 다급히 말했다.상사 앞에서 당신의 나체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그런데 그의 눈빛에서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착각일까?고은영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재차 말했다.“정말 아무것도 못봤어요.”“그래?”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
하지만 날카로운 나태웅의 눈빛을 마주하자 도망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고 비서, 괜찮아?”그녀가 멍하니 있자 나태웅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아… 괜찮습니다.”그녀가 다가가자 나태웅은 노트북 화면을 그녀에게 돌렸다. 화면에서 그녀가 배준우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날짜가 맞았다.고은영은 머리 속이 완전히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몇 초 정도 지나자 화면에 지저분한 점들이 생기더니 꺼져 버렸다.안지영이 삭제한 부분일 것이다.고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태웅에게 말했다.“이 영상 맞아요. 안지영 씨랑 아침까지 지켜봤는데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습니다.”그녀가 그 방에 밤새도록 있었기에 그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영상이 손상되었으니 고은영과 안지영, 그리고 매수한 보안센터 직원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은영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태웅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영상 복구해 주세요!”고은영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와 나태웅을 번갈아 보았다.“이분은….”“강성 IT센터 팀장, 진재한 씨야!”진재한!그 이름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 기술자가 바로 진재한이었다.배준우는 그를 본사로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진재한은 줄곧 제안을 거절해 왔다.나태웅이 그 여자를 찾으려고 진재한까지 동원할 줄이야!진재한은 노트북을 건네 받고 자신감 있게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이런 건 일도 아니죠! 맡겨만 주세요!”고은영은 등 뒤가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그녀는 어렵게 정신을 차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따로 할 일은 있나요?”고은영의 질문에 나태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비서는 일단 나가서 일해!”“네.”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밖으로
고은영은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눈알이 새빨개진 상태로 비상계단에서 나갔다.비서실 직원 민초희가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울었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고은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민초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많이 힘들면 장기 휴가 신청하고 쉬는 것도 방법이에요!”동영그룹 직원이라면 배준우 밑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물론 급여는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위치였다. 고은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민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감사해요. 안 그래도 지금 휴가 신청하러 가는 길이었어요.”더 이상 회사에 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민초희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고은영도 자리로 돌아가서 휴가 신청서를 작성한 뒤, 나태웅의 사무실로 갔다.영상이 어디까지 복구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휴가를 내려면 나태웅의 동의가 필요했다.그 뒤에 배준우에게 보고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은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나태웅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상 파손 정도가 심각하네요.”“복구가 불가능해요?”나태웅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고은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진재한도 복구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고은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진재한이 말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3일 정도면 될 것 같네요.”“진 팀장에게 3일이나 쓰게 하다니. 장난을 친 자가 실력이 좀 되나 보네요!”나태웅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은영은 다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지금 당장은 복구하지 못했지만 3일 뒤에 만약 그가 성공적으로 복구해 낸다면?진재한도 정색하며 말했다.“네 실력이 상당한 자입니다.”“알았어요. 3일 드리죠.”다시 자리로 돌아간 고은영은 휴대폰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복귀할 필요 없어.
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반면 배준우는 해커까지 동원했다는 얘기에 잠시 표정을 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체할 시간이 없어.”고은영은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태영은 그 의미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 일이 있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그 여자가 숨었다는 건 아마 임신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여자의 배후도 그걸 바라고 행동했을 것이다.그렇다는 건 그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유력한 무기를 들고 나중에 배준우를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그럼 어떻게 할까요?”배준우는 계모가 추천한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결국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난리를 부렸던 거잖아? 그럼 계획을 무효로 만들어야지!”그 여자가 자신의 측근을 그에게 결혼상대로 들이밀기 전에 결혼하면 그만이다.세 사람 중 고은영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결혼상대를 물색할까요?”고은영은 순간 놀라서 사레들려서 쿨럭거렸다.무거웠던 흐름이 그녀의 요란한 기침소리에 잠시 끊어졌다.배준우와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바라보자 고은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도망치듯 배준우의 사무실을 나갔다.너무 충격적이 소식이었다.어떻게 저런 분위기에서 결혼상대를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이 얘기할 수 있지?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성별만 여자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영은 휴게실로 달려가서 생수를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나태웅과 배준우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태웅이 물었다.“생각해둔 상대가 있나요?”배준우는 담배 한모금 길게 들이마시고 서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친모가 돌아가신 뒤, 계모라고 들어온 여자는 어떻게든 그를 통제하려고 했다.지금 그 여자는 동영그룹 전체를 손아귀에 잡고 흔들려는 게 분명
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네, 실장님.”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실장님, 저 왔어요.”“문 닫아.”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싫다고 하면요?”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언니한테 있어요.”고은영이 말했다.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기간은… 얼마나 될까요?”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위장결혼이라면서요?”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잘 얘기했어?”나태웅은
게다가 그녀가 갈 때 선물을 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언니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빈손으로 가면 두고두고 언니한테 불평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백화점이 가까워지자 언니를 다그쳤다.“많이 안 사. 빨리 사이즈나 말해줘. 샀다가 작아서 못 입으면 환불하기 더 귀찮아.”“은영아!”“빨리!”고은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사이즈를 알려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이 말했다.“언니도 강성 인근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못 보지않아?”“가정도 있는데 내가 자꾸 가면 부담될까 봐.”언니 고은지를 통해 고은영은 느낀 바가 있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이지 남녀가 사랑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오늘 나태웅이 배준우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지금 배준우가 성격도 고약하고 같이 일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직장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친언니 만나러 가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안지영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친구가 불쌍했다.유일하게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친언니니까 언니가 입장 곤란해지는 건 싫어.”언니는 어렸을 적 고은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맛있는 거 생기면 항상 동생 먼저 챙기고 운 좋게 새 옷이 생겨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지금도 언니 집에 놀러 가면 어떻게든 맛있는 거 차려준다고 난리를 떠니 시어머니가 고깝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백화점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같이 가주겠다는 안지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갔다. 안지영과 쇼핑하면 대부분 그녀가 계산하기 때문이었다.이미 안지영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자꾸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안지영이 그녀에게 카드를
나태웅은 이런 일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기를 원했다.나태웅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진이훈은 그런 나태웅을 말리고 싶었으나 차가운 나태웅의 모습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삼켜버렸다.몸 돌려 사무실을 떠나던 진이훈은 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물었다.“정, 정말 보내실 겁니까?”“2만 송이!”“...”재차 확인하려 했으나 꽃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진이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안지영이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은 국화를 보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태웅은 화가 많이 났다.퇴근 전, 2만 송이의 국화가 안지영의 하늘 그룹에 도착했다.너무 많아서 프런트와 홀에도 꽃이 가득했다.안지영은 부승호와 얘기를 나눈 후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문을 여는 순간 안지영의 앞에는 하얀색 파도가 일렁였다.안지영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부승호는 눈앞의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이건...”“...”안지영은 화가 난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안열, 안열!”안지영은 이를 꽉 깨물고 안열을 불렀다.안열이 당장 달려왔다.“대표님.”“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안지영이 분노에 차서 물었다.이 재수 없는 것은 분명 하늘 그룹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들여오지 않으면 하늘 그룹 외벽을 둘러쌀 겁니다.”그렇다면 밖에서 본 기자들이 재미난 기사들을 써 내려갈 것이다.“...”안지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나태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이 개 같은 놈이...’말하지 않아도 나태웅이 한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뭐해요! 지금 당장 돌려보내요. 천락 그룹 안에 가져갈 필요 없어요. 밖에 쌓아둬요!”안열은 하늘 그룹이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했지만 안지영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지금 당장 천락 그룹을 영안실로 만들어버릴 예상이었다.안지영은 화가 나서 충동적이었다.부승호는 이 꽃들을 천락 그룹에 돌려보낸다는 말을 듣고 머리가 아팠다
안지영은 그딴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몰라요. 당장 보내버려요!”만나서 또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런 비열하고 쪼잔한 방법이라도 쓰는 것이다.안지영은 나태웅에게 몇 배로 갚아줄 생각이었다.안열은 그런 안지영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시켜 꽃을 돌려보내겠습니다.”사무실의 국화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하지만 국화의 향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안지영은 그것 때문에 아주 짜증이 났다.한 시간 후, 천락 그룹.나태웅의 사무실과 사무실 밖의 복도까지 국화꽃으로 가득 찼다.흰색과 노란색이 섞여 눈을 사로잡았다.사무실의 사람들은 놀라고 또 의아해했다. 이건 그야말로 사무실이 아니라 장례식장이었다.진이훈은 이 국화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대, 대표님...”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도 또 뭐를 말해야 할지 몰랐다.게다가 이 모든 것이 안지영이 보내온 것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뭐 하자는 거지? 저주인가?요즘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해서 저주라도 하는 건가?나태웅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었다.“안지영!”나태웅은 이를 꽉 깨물었다.진이훈은 그 목소리를 듣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안지영 씨한테 돌려보낼까요?”그 말을 꺼낸 후 진이훈은 후회하고 말았다.나태웅의 성격을 알면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되었다.나태웅의 성격대로라면 정말 안지영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것도 몇 배로 말이다.안지영 때문에 사무실은 장례식장이 되어버렸다. 나태웅이 정말 이성을 잃는다면 국화꽃으로 하늘 그룹을 묻어버릴지도 모른다.아니나 다를까 나태웅은 진이훈의 말을 듣고 바로 대답했다.“당연히 돌려보내야지. 만 송이 더 얹어서 가!”‘누구는 저주할 줄 모르나?’“...”진이훈은 본인의 뺨을 때려버리고 싶었다. 왜 굳이 그 질문을 했을까 후회했다.“그... 안 좋지 않을까요?”“뭐가!”“지금 안진섭 씨가 병원에 있는 시점에
지금 고은지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그래서 고은영의 도움도 마다하고 홀로서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고은지는 인생이 참으로 버겁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시각.안지영도 비슷한 기분이었다.점심에 장선명과 같이 밥을 먹고 돌아와 보니 사무실에 꽃이 가득했다.안지영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물었다.“이게 다 뭐예요?”“나태웅 대표님이 보낸 겁니다.”안열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안지영을 향해 대답했다.웃음을 참느라고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안지영은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어젯밤 나태웅은 킹덤 타운에 쳐들어와 싸움했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꽃을 선물하다니.게다가 하얀 국화꽃이었다.‘이제는 내가 죽기를 저주하는 건가?’“왜 갖고 들어오게 한 거예요!”안지영이 겨우 화를 참고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왜 나태웅 같은 인간쓰레기와 엮이게 된 건지.전에 동영 그룹에 있을 때, 나태웅은 배준우의 믿을만한 오른팔이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나태웅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일을 수도 없이 그르쳤을 것만 같았다.안열은 안지영이 화내는 모습을 보고 마른기침을 하고 대답했다.“꽃집에서 직접 배송한 겁니다.”“앞으로 이런 재수 없는 일은 쳐내도록 해요.”“네. 알겠습니다.”안열은 계속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 안면근육이 뻐근할 정도였다.안지영은 그런 안열을 보면서 화가 나서 얘기했다.“웃지 마요! 이게 웃겨요?”안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아마 장미를 선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장미랑 국화도 구분하지 못할 사람 같아요?”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장미와 국화 정도는 쉽게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안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네요.”나태웅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여자한테 국화를 보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사실 안지영은 나태웅이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찌하겠는가.량천옥은 하마터면 고은지를 죽일 뻔했고 고희주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그러니...“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뭘 할지 잘 알 거예요.”고은영이 보충해서 얘기했다.량천옥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모든 대가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량천옥은 잘 알고 있었다.고은지가 나태현과 손을 잡고 량천옥을 공격할 것이라는 걸....고은지는 천락 그룹으로 돌아왔다.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본인의 위치로 돌아가 앉았다.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고은지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었다. 이지훈은 돌아온 고은지를 보고 물었다.“오셨군요.”“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나 대표님께서 사무실로 부르셨습니다.”컵을 들었던 고은지는 이지훈의 말을 듣고 손에 힘을 주게 되었다.기운 또한 더욱 차가워졌다.이윽고 정신을 차린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그래요.”“얼른 가요. 한참 기다리셨습니다.”이지훈이 덧붙였다.고은지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훈을 쳐다보았다. 이제 가겠다는 눈빛을 보내자 이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지는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이지훈은 고은지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고은지는 대표 사무실로 와서 노크를 했다.안에서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고은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나태현은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날카로운 나태현의 옆태는 아주 차가워 보였다.대표 사무실에서는 차가운 기운과 하얀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고은지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냄새를 뺐다.뒤에 있는 나태현이 물었다.“공항에 간 거야?”“네.”고은지는 담담하게 한 글자로 대답했다.“나랑 오래 일 했으면서 왜 아직도 무의미한 일을 하려고 그래.”고은지는 창문을 닫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톱에 살갗을 파고들 정도였다.고은지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얘기했다.“아이의 일로 저를 협박하지 마셨어
낯빛이 창백해진 고은지를 보면서, 고은영은 고은지가 얼마나 힘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그래도...”“은영아, 너랑 희주는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희주는 그래도 친아빠한테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너도 꼭 아프지 말아야 해. 알았지?”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고은영은 약간 가슴이 아팠다.량천옥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다가 고은지의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고은영과 고희주는 고은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고은지가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않지. 저 사람처럼 말이야.”그렇게 말하면서 고은지는 량천옥을 쳐다보았다.“...”“...”그 순간 호흡마저 무거워졌다.량천옥은 고은지를 쳐다보면서 바르르 떨었다.고은영도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언니...”량천옥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의 신분을 모르길 바랐다. 고은지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두려웠다.그리고 이 순간, 량천옥은 고은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면 량천옥은 고은지의 무슨 사람인가.혈연관계가 있는 사람? 엄마나 어머니 같은 이름은 량천옥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량천옥 또한 본인이 자격 미달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언니...”고은영이 굳은 채로 입을 열었다.고은영은 고은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맞지?”고은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고은지의 차갑고 증오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대답이 목에 턱 막힌 기분이었다.결국 고개만 끄덕였다.고은지는 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비웃음과 풍자가 가득했다.“...”량천옥은 고은지를 향해 걸어가려고 했지만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
량천옥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이제 고은지에게는 온화한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방을 압도하는 차가운 기운만이 남아있었다. 온화한 고은지의 모습을 떠올린 고은영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음이 아팠다.“언니.”고은영이 앞으로 다가가 고은지의 손을 꼭 잡았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그렇게 말하는 고은지에게서는 차가움만이 느껴졌다.그 말투는 마치 날카로운 침처럼 량천옥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무 아파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량천옥은 겨우 참느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서 있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먼저 희주부터 찾자.”고희주가 이 공항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고은영의 말에 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고은영이 얼른 고은지를 따라갔다.량천옥은 제 자리에 서서 고은영과 고은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량천옥은 절망스러움을 느꼈다.결국 모든 것에는 인과응보가 있는 법이다. 본인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량천옥은 돌아선 후 고객센터 쪽을 찾아갔다.그들은 빠른 속도로 고희주가 국내에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결국 그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나태현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진작 전용기를 이용해 고희주를 데려갔던 것이다.고은지는 온몸에 맥이 풀려 공항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고은영이 고은지 앞에 쪼그려 앉았다.“언니...”“왜 나한테 일찍 알려주지 않은 거야?”고은지는 고은영을 보면서 겨우 물었다.차가운 시선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만약 진작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태현이 아이를 데려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때는 많은 일들을 확인해야 했었어, 그리고 나태현 씨도...”지신혜와 약혼했으니 말이다.고은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처음에는 고은지의 건강 때문에, 후에는 나태현의 약혼 때문에.결국 따지고 보면 고은지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량천옥을 만날 것인지 물으려던 이지훈은 나태현의 태도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지훈이 나가고 사무실에는 나태현만이 남았다. 나태현이 내뿜던 차가운 기운은 어느새 무거운 슬픔으로 바뀌어있었다....고은지는 천락그룹에서 나와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그리고 동시에 고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은영은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언니.”“은영아, 마지막으로 나 한 번만 도와줘.”고은영은 마침 량천옥과 같이 있었는데 고은지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언니, 난 언니가 도와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거야. 왜 마지막이라고 그래?”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은 고은영은 마음이 아팠다.고은지가 자꾸만 고은영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것 같아서였다.아무리 홀로서기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 급할 것 없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고은지가 입을 열었다.“배준우의 사람을 시켜서 공항 이륙을 연착시켜 줘. 가능해?”고은지는 배준우가 강성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두 시간이면 돼!”고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은지가 덧붙였다.“그래.”“빨리. 급해. 희주가 공항에 있을 수도 있어.”“뭐?”놀란 고은영이 좀 큰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량천옥을 쳐다보았다. 량천옥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고은지의 말을 들었다.고희주가 공항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량천옥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먼저 준우 씨한테 연락해 볼게.”말을 마친 고은영이 전화를 끊었다.‘희주가 공항에 있다고? 나태현 씨가 데려간 거 아니었나? 도대체 뭘 하려고? 해외로 보내는 거지?’거기까지 생각한 고은영은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얼른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여보, 공항 쪽에 연락해서 모든 비행기를 두 시간 정도 연착시켜 줄 수 있어요?”“무슨 일인데?”“나태현 씨가 희주를 해외로 보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누가 봐도 나태현이 복수를 위해 이런다는
친모라는 두 글자에 고은지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느꼈다.하지만 더욱 메스꺼운 것은 나태현이 고은지에게 한 모든 행동들이었다.고은지는 핸드폰을 나태현에게 주면서 말했다.“희주를 란완 리조트로 돌려보내요. 거래는 아직 유효해요.”고은지는 아이와 량천옥 사이에서 자기 아이를 선택했다. 량천옥이 자기 친모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량천옥을 떠올리면 남는 것은 증오뿐이었다.나태현은 고개를 들어 고은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리고 바로 시선을 내렸다.“너도 알잖아. 선택지가 없다는 걸.”“아이가 없어도 난 당신이랑 계속 거래를 할 거예요.”현재 고은지는 량천옥을 증오할 뿐만이 아니라 나태현도 증오하고 있었다.고은영을 만나고 온 후 고은지는 나태현을 향한 증오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은지는 여전히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그래서 나태현과 담담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실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말을 마친 나태현은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꺼버렸다. 불꽃이 물에 닿는 그 순간 불꽃이 꺼지면서 치익 소리가 났다. 나태현의 차가운 말투를 들으면서 고은지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눈에 넘실대는 증오를 감췄다.“희주, 깨어날 수 있는 거죠?”“당연하지.”“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믿겠어요?”고은지가 차갑게 물었다.“희주는 내 딸이야. 내가 내 딸을 해칠 것 같아?”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나태현은 희주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하지만...‘됐어!’고은지는 나태현과 연관된 일에 많은 생각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그저 나태현의 차가운 말투를 들으면서 나태현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태현과 량천옥의 복수에 고은지를 끌어오다니.“그러면 언제 만나게 해줄 거예요?”고은지가 바로 물었다.나태현이 고희주를 란완 리조트에서 데려간 그 순간부터, 고은지는 앞으로 쉽게 고희주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
고은지는 아주 빠르게 나태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지훈은 좋지 않은 고은지의 표정을 보고 얼른 고은지의 앞을 막아 나섰다.“나 대표님은 곧 회의 때문에 바쁘십니다. 이만하시죠.”이지훈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고은지의 표정만 보고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지훈은 고은지가 진정한 후 다시 찾아왔으면 했다.하지만 고은지는 그런 이지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지훈을 피해 바로 나태현의 사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제가 분명...”나태현은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시선을 들었다.고은지를 마주한 나태현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뭐 하자는 거지? 아프더니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다 까먹은 건가?”나태현이 차갑게 얘기했다.이지훈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졸였다.고은지는 나태현의 차가운 말에 동요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나태현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말했다.“지금은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단계일 텐데. 얼른 돌아가지 못해?”“날 이용한 거예요?”고은지가 바로 얘기했다.여기까지 오는 길, 고은지는 엘리베이터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고은영이 왜 말을 하다가 만 것인지, 나태현이 왜 자기를 찾아온 것인지.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고은지는 총명한 사람이니 그 짧은 시간 안에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알 수 있었다. 나태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서류를 내려놓고는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고 차갑게 물었다.“이제야 안 거야?”“나태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고은지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찾아온 사람이다.나태현은 그런 고은지의 말을 들으면서 고은지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구나 짐작하게 되었다.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담배 연기를 토해낸 나태현이 물었다.“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