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대시하면 하는 거지 뭐.’‘정말 연애하면 여자만 고생하는 거야. 흥.’‘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고 문제 틀렸다고 얼굴에 엑스나 그을 사람이라고!’‘다투면 무시하고 냉전이나 할거고 키스하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체할 거야.’반우희는 꾸역꾸역 파이를 입에 넣고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했다.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아마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는 거라 여겼다.‘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반우희가 자기 암시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안의 부승원은 루나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그리고 풍성한 꽃다발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루나 씨, 이번 일은 교수님 얼굴을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런데 또 한 번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한다면...”“절대 없을 겁니다!”루나는 맹세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만 나가봐.”“넵!”루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방을 나섰다.그리고 루나가 밖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루나는 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기를 시작했다.“네. 저녁 10시 창가 자리로 예약해 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벌써 두 사람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그리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 내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사실 예전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부연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치솟고 자꾸 반우희가 마음에 걸렸다.반우희는 늘 가십거리에 예민했고 이런 일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반우희와 키스를 한 사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회사 직원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반우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에 뻔했다.‘아니지. 내가 왜 반우희 걱정을 해?’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들어 반우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똑똑똑.노크 소리
‘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돈 주세요!”반우희의 말에 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해고하는 거면 배상해 주셔야죠. 세 배 금액으로!”“...”“빨리요!”반우희는 굳은 얼굴로 루나를 재촉했다.‘그래. 돈은 주면 그만이지. 빨리 우희 씨 자극해 두 사람 관계에 불이 붙게 하는 게 우선이야.’루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가방에서 한 묶음의 현찰을 꺼냈다. 그 금액이 족히 200만 원은 되어 보였다.“가져가요.”루나는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건넸고 정말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반우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어때? 화나지? 빨리 날 욕하고 부승원한테도 퍼부어!’“지금 그 금액으로 날 거지 취급해요? 시급이 20만 원이고 한 달에 8번 근무였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2,000만 원은 주셔야죠!”‘뭐야? 이게 아닌데?’반우희는 화를 내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의자 위로 휙 벗어 두었다.“현금이 없으면 수표라도 주세요! 빨리요!”루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래도 이번 연기에 누군가 모두 책임질 거라 했기에 불을 더 붙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자, 여기 2,000만 원. 됐죠?”방금보다 더 과한 연기와 액션이었다.하지만 반우희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가방을 챙겨와 루나가 보는 앞에서 현찰과 남은 간식을 챙겼다.‘그만두라고 하면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변태 사장, 나도 싫어!’‘퉤.’반우희는 간식을 쓸어 담으며 또 루나를 흘겨보았다.‘정말 끼리끼리 잘 만났어.’루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이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반우희가 먼저 부승원에게 찾아가는 계획에 실패했다면 부승원이 먼저 다가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루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참, 쓰레기도 가지고 내려가세요.”반우희는 가방을 척 메고 표독스럽게 루나를 노려보며 문으로 향했다.‘그래. 간다. 가!’루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반우희를 몰래 살폈다. 다른
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달려갔으나 반우희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큰 소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197만 원... 198만 원...”“2만 원이나 부족하잖아!”“나쁜 사람. 어떻게 이 돈도 떼먹냐!”반우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돈을 움켜쥐고 표정을 구겼다.공돈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반우희는 몇 년 전 부승원이 했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부승원은 자신의 신분으로 부승원을 넘보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 했었다.하지만 반우희는 단 한 번도 부승원을 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을 가끔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매일 독설만 날리는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지 않은가?‘그런데 부승원은 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고 키스도 마음대로 하는 걸까?’‘술이 면죄부야?’‘변태!’이런 생각을 하며 반우희는 고개를 숙여 움켜쥔 돈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짜증 나.’‘어떻게 돈으로 사람을 내칠 수 있냐?’“그래. 돈 많아서 참 좋겠네... 짜증 나!”눈물이 추위에 빨개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고,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 남성 구두가 보였다.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부승원은 소나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토끼 모자가 보였고 작게 몸을 웅크린 토끼가 돈을 한 장 한 장세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녀석이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엔 곧이곧대로 듣고 무턱대고 집을 박차고 나가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반우희의 코며 손등이며 빨갛게 부어오른 게 보였고 눈시울까지 붉어진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반우희가 먼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든 돈을 가방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하고 반우희의 옆으로
반우희가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는 말에 부승원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래서 빠르게 다시 손목을 잡고 말했다.“루나는 내 학교 후배이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런데 왜 루나 씨는 변호사님 약혼녀라고 한 거죠?”“오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너한테 자꾸 농담하는 거야.”반우희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농담?’‘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어린 애인 줄 아나? 이런 일로 농담하게?’“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이제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배상금도 받았으니 다시 나오지 않을 거예요!”그리고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러나 부승원이 또 한 번 반우희를 붙잡았다.자꾸 반복되는 상황에 반우희는 정말 화가 났다.“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왜 자꾸 저를 잡는 건데요?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에요?”“변호사님은 남자, 저는 여자인데 우리 선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반우희가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쏟아붓자 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그러나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고 반우희는 아예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약혼이든 아니든 저랑 아무 상관 없고 다시 저 유혹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남남이고 다시 만나지 않는 거예요!”“지금 뭐라고 했어?”반우희는 아주 당당했다.“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그날 스파게티도 해주고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또 키스도 했잖아요!”마지막 키워드에는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러자 부승원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천하의 변호사 부승원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러나 반우희는 한번 시작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키스 말이 나와서 그러는 건데요. 제 허락은 받으셨어요?”“그때 변호사님이 저한테 그랬잖아요. 거리 유지하고 절대 변호사님 넘보지 말라고!”부승원은 바로 허점을 찾아 말을 끊었다.“내가 너한테 넘보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네! 그게 그 뜻이죠. 뭐!”반우희는 오히려 더 다가와 거의 한 대 칠 기세로 말했다.“몇 년 전 시연 언니가 떠나기 전, 우리 집 계단에서 저한
반우희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변호사님도 돈 주시게요?”“...”“키스하고 돈을 받으려고? 정말 날 뭐로 보고?”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변태요.”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했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반우희의 양 볼을 꼬집으려는데 반우희가 한발 빠르게 목을 뒤로 움츠려 얼굴을 목도리 안으로 숨기고 동그란 두 눈만 드러나게 했다.그렇게 두 눈이 마주치고 부승원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무의식적으로 보인 반우희가 너무 귀엽게 보여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부승원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손을 거두었다.“올라가서 천천히 얘기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래요.”‘내가 뭐 무서워할 줄 알고?’부승원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으나 다시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앞으로 걸으며 자연스레 반우희의 손을 잡았다.반우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잡힌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부승원을 따라 걸고 있었다.그렇게 오피스텔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루나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화가 났고 루나한테 직접 따지려 했다.그러자 부승원은 손에 힘을 주어 반우희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루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유롭게 걸어왔다.“선배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너랑 뭔 상관인데!’반우희는 하마터면 바로 말을 뱉을 뻔했으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나의 호칭이 이상했다.‘선배님?’반우희는 부승원에게 잡힌 손과 루나를 번갈아 바라봤다.‘두 사람 연인이라며?’‘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데 화도 안 나?’부승원은 다시 반우희를 등 뒤로 숨기며 루나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연정훈 부부가 너한테 얼마나 큰 딜을 했기에 이러는 거야?”루나는 웃음이 터졌다.“선배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부승원이 헛웃음을 내쉬었다.루나는 등 뒤의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저는 미션 완수했으니 어린 친구에게 제대로 사과할게요. 방금은 죄송했어요. 돈은 첫 만남 선물로 해두죠.
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날이 어두워졌는데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했던 남자는 없었어요.”‘그러니까 유혹하는 게 맞지!’부승원이 말을 이었다.“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래.”“그런 사람이 나한테 키스해요?”“그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쳇.”반우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비아냥거렸다.“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요?”“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키스한 건데요?”“...”반우희는 말을 계속이었다.“그리고 나한테 키스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요!”‘흥. 어디 한번 변명해 보시지?’부승원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말없이 가스레인지를 켜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반우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왜요? 왜 말이 없어요?”부승원이 몸을 돌려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요리해 주는 건...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로 치자.”유혹이라는 단어는 너무 속 보여 단어를 바꿨다.그러자 반우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건 모르죠.”“내가 그동안 밥도 해주고 간식 몰래 먹는 것도 모르는 척해줬는데 왜 내가 호감 표시하는 걸 몰랐어?”“...”“그때부터 알아차렸으면 미리 피해 다니지, 그래.”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그게...”부승원은 덤덤하게 한 방을 먹이고 면을 휘저었다.“그럼,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린 걸까?”부승원은 이 질문으로 반우희가 잠시 잠잠해질 거로 생각했지만 반우희는 거침이 없었다.“흔들렸으면 왜요?”부승원이 행동을 뚝 멈췄다.반우희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외모가 제 취향이라 좀 흔들렸다면 어쩌시려고요?”‘이젠 어떻게 나오실 건가?’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차가운 성격을 가졌지만 잘생긴 외모와 좋은 가문, 그리고 공부도 곧 잘해 고백을 셀 수 없이 받았었다. 요즘 들어 뜸하긴 했으나 없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반우희처럼 직접적인 사람은 드물었다.부승원은 재차 말문이 막혔고 귓불부터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인
예전이라면 조재민은 당연히 양민아의 말을 의심했겠지만 몇 달간의 고문 끝에 정신이 흐려져 생각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그때 그의 시선이 양민아의 배로 향했다.“아이는 괜찮아요?”양민아는 조재민을 의자에 앉히고 그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건강해요.”조재민은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비록 그가 죽는다 해도 조재민의 아들은 남을 것이다.양민아는 독사처럼 치명적이지만 그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엄마가 곁에 있는 한 아이는 반드시 살아남을 터였다.“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양민아가 묻자 조재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냥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요. 아니면...그냥 죽으면 되는 거고.”그는 양민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앞으로 다시 오지 마요.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까지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죠.”양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섬세한 화장 속에서 비웃음이 스며든 눈빛을 보였다.“위층에서 좀 쉬세요. 뭐 좀 가져다드릴게요. 다 드시고 나면 저는 떠날 거예요. 여기 정말 안전하지 않아요.”조재민은 잠시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잠시 후 양민아는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식은 죽을 저어 건넸다.조재민은 죽을 받지 않고 대신 손을 뻗어 양민아의 배를 만지려 했다.“검사했어요. 아들이에요.”그녀가 말했다.조재민의 흐릿한 눈에 희미한 빛이 스치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피곤한 듯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잠결에 팔에 스치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양민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양민아는 주사기를 손에 쥔 채 그의 서늘한 눈빛과 맞섰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이
아침 햇살이 살며시 방 안을 물들이자 한때 뜨겁고 격렬했던 감정도 서서히 잦아들었다.이승우는 품에 안긴 부승희에게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그가 더 부드러워질수록 부승희는 점점 더 그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조금씩 정신을 차리려고 하며 도망치려 할 때마다 이승우는 부드러운 가면을 벗고 다시 강압적으로 다가왔다.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그녀의 강한 태도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언제부터인지 부승희는 이승우의 목을 감싸고 그의 리듬에 맞춰 몸을 맡기며 점점 더 빠져들었다....아침에 양시연은 아직 자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끊었다. 전화가 온 번호를 확인하고는 반쯤 깨어 있는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 놓고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 했다.“누구예요?”양시연이 흐릿한 눈으로 물었다.“너 자고 있어. 내가 나가서 받을게. 끝나면 돌아와서 말해줄게.”“네...”양시연은 너무 피곤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잠을 청했고 얼마 후 발소리를 들은 그녀는 눈을 떠보니 연정훈이 돌아왔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품에 안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양민아를 찾았어.”“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잠이 싹 달아나며 고개를 들었다.“양민아?”“응.”양시연은 변백호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한 것에 놀랐다. 한번 말했을 뿐인데 바로 사람을 찾아냈다.연정훈은 말을 이었다.“양민아를 찾았을 때 이미 성형으로 얼굴을 완전히 바꾸고 지국주의 작은 나라에서 새 신분으로 살고 있었어. 땅을 사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지.”양시연은 조금 감탄했다.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후에도 양민아는 온전히 빠져나와 자리를 잡고 나서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양민아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아직 데려오지 않았어. 변백호가 우리의 의도를 물어보더라고.”“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변백호 씨에게 데려오게 했어.”양시연은 그의 계획을 알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잠시 더 이
여자가 끌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승희는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분노는 잦아들었고 조금 전 그를 휘감았던 충동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이승우가 무슨 말을 하든 부승희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너무 늦었어. 이제 집에 갈게.”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승우가 다급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팔을 단단히 조였다.“나 정말 너 몰래 다른 짓 한 거 아니야.”부승희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알아. 그러니까 일단 나를 놔. 나 그냥 집에 가려고.”“집엔 왜 가? 방금 그 난리 치고 그냥 모른 척할 거야?”부승희는 어이없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대체 뭘 책임져야 하는데? 내가 뭘 했다고? 손 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이승우는 이를 악물었다.‘이런 젠장.’이승우는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지만 지금은 최대한 냉정을 되찾고 분위기를 되돌릴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너 질투했지?”“질투는 무슨!”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맞네. 질투했네.”“헛소리 그만하고 손 안 놔? 안 그러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옆얼굴에 입술이 스쳤다.부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는 다시 반대쪽에서 그녀의 얼굴을 돌려놓았다.그녀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는 사이 이승우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올리고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부승희는 하늘이 갑자기 희미하게 밝아지는 걸 발견했고 아까의 어두컴컴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제 서로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난감하고 긴장됐다. 이 상황이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차라리 그의 신경을 긁어놓기로 결심했다.“이승우, 나한테 이러지 마. 아까는 그냥 술기운에 그랬던 거야. 아무 의미 없어. 그리고 그 여자 때문에 질투할 일도 없어. 너랑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그래. 그런 한심한 애가 너한테 질투받을 자격은 없지.”이승우는 그녀의 말을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파 위의 이승우와 부승희는 그 자리로 얼어붙었다.이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어색해 보이는 부승희의 시선을 마주하며 속으로 수천 번 욕을 읊조렸다.“아마도 번지수 잘못 찾은 사람 같아.”그래서 빠르게 말을 보탰다.부승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승우를 슬쩍 밀어냈다.“문이나 열어.”“그럼 넌?”“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지!”‘젠장.’이승우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친 게 너무 원통스러웠지만 밖의 노크 소리로 점점 커졌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어. 바로 처리하고 갈게.”“꺼져.”“...”어둠 속에서도 상처받은 듯한 이승우가 보이는 것 같아 부승희는 피식 웃음이 나갔다.그러나 문밖의 상대는 점점 더 과열되게 문을 두드렸다.부승희는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말했다.“문이나 열어, 이 멍청아.”이승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밖의 남자에게 부승희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부승희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승우의 품에 쏙 안겼다.“승우 씨.”‘여자?’방 안으로 들어선 부승희는 거실의 어두운 불빛을 빌어 현관을 살폈다. 이승우의 품에 안긴 여자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부승희는 심장이 철렁했다.그러나 황당한 건 이승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이승우는 빠르게 그 여자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러나 집 안에서 문을 쾅 하고 닫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승우는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젠장. 승희가 오해했을 거야.’그러자 화가 난 이승우는 계속 품을 파고드는 여자를 휙 내동댕이쳤다.“꺄악!”짧은 비명이 평화롭던 새벽의 조용함을 깨뜨렸다.이승우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별장 경비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말투가 상당히 거칠었다.화가 난 이승우의 목소리에 경비원은 빠르게 집을 찾았다.거실 전등을 켜자 이승우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그러나 이승우가 변명하기도 전에 부승희는 옷
어떤 기분이라...키스가 전체적으로 달콤했던 것 같았다. 또 이승우가 마신 과일 알코올 향이 느껴져 달짝지근하니 거북하기만 했다.부승희는 애써 쿵쿵거리는 기분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과 불규칙한 호흡이 벌써 부승희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그때.쪽.이승우는 부승희의 볼에 짧게 뽀뽀했다.부승희가 당황한 찰나, 이승우는 두 번째 뽀뽀를 강행하려 했고 부승희는 빠르게 손으로 가려 입술을 막아섰다.그러다 보니 이승우는 부승희의 손바닥에 뽀뽀했고 그와 동시에 한 손은 부승희의 허리에, 다른 한 손은 부승희의 손목을 잡고 뒤로 눕혀버렸다.등에 소파가 닿는 것도 잠시 부승희는 이승우가 도로 소파에 누우며 그 몸 위로 올라타게 되었다.두 눈이 마주치고 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희의 턱에 짧게 뽀뽀했다.부승희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고 주먹질이나 하며 어색한 기분을 숨기려 했다.그러나 먼저 눈치챈 이승우가 부승희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앞으로 내려놨다.“그만 때려. 벌써 매만 몇 번째인지 알아? 우리 대화로 하자, 응?”“지금 이게 나랑 제대로 대화하려는 사람 태도 맞아?”부승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렸다.“응. 대화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부승희는 거의 이승우의 몸 위로 겹쳤고 이승우가 덮고 있는 얇은 담요도 바닥에 떨어져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겨우 옷을 사이 두고 이승우의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이어 작은 몸 다툼이 벌어졌다. 부승희가 손을 빼내면 이승우가 다시 손목을 잡았고 허리를 일으키려 하면 이승우가 허리를 잡고 눕혔다. 어쨌든 절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부승희는 어느새 땀이 났고 두 사람 주변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이승우는 여전히 부승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승희야, 그때 나한테 몰래 뽀뽀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부승희는 이제 머릿속이 텅 비었고 아예 이승우를 꽉 깨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턱이 간질거리자 부승희는 이승우의 손길을 내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우의 손은 쉽게 밀려나지 않았고 부승희는 아예 손목을 잡고 아래로 끌었다.“왜 그러는 거야?”이승우는 손은 어느새 아래로 끌려 부승희의 허리춤으로 내려갔고 부승희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절로 다른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이승우는 부승희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술 꽤 많이 마셨는데 불편한 곳은 없어?”부승희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이승우가 가져간 물컵을 도로 쥐려고 했다.하지만 이승우가 그 손을 찰싹 때렸다.“또 마시려고? 따뜻한 물로 다시 따라줄게.”“잔소리하긴.”부승희는 이승우와 실없는 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나 이승우가 손목을 살짝 잡아 떠나려는 부승희를 잡았다.부승희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뭐야? 한판 하자는 건가?’이승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등 켜줄게. 돌아가는 길에 넘어지지 말고.”부승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뻗어 이승우의 머리를 뒤로 쭉 밀었다.그러나 부승희가 별로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이승우는 아픈 소리를 냈다.부승희가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엄살은.”이승우는 작게 탄식하며 가까이로 상처를 보여줬다.“엄살 아니야. 네가 어젯밤 물어서 정말 아픈 거라고.”“...”‘잘 지내다가 왜 또 그쪽으로 대화가 돌아가는 거야?’어두운 거실, 부승희는 이승우의 이글이글 불타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승우가 결코 좋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부승희도 알고 있었다. 거실로 나오기 전에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지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쌤통이지 뭐. 오빠가 키스하지 않았으면 그럴 일도 없었잖아.”“네가 먼저 시작한 건데 날 탓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봐주지도 않았을 거야.”“웃기시네.”“빨리 봐봐.”이승우는 자연스레 부승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피 나는 거 아니야?”부승희는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헛소리하지 마. 벌써 몇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남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이승우의 마음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 끝이 아름답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승우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쳤고 아무도 그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이승우는 타고나길 만인의 연인이었고 부승희는 이승우가 만났던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승우가 술 한잔하며 과거 얘기를 안주 삼을 때 거론되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부승희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미모 좋고, 학벌 좋은 완벽한 여자였다. 그런데 굳이 그런 오점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부승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설득했다.그러나 다른 한편, 인생은 한 번뿐이니 끝이 좋지 않더라도 시도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떠나는 건 순서가 없다는 데 그러다가 영영 떠나보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나이가 들어 본인이 이승우의 안주 거리가 될 수도 있고, 이승우도 본인의 안주 거리가 될 수 있었다.그러니 젊었을 때 첫사랑의 꿈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마침 이승우도 지금 부승희를 좋아하지 않은가?그러니 이 기회를 빌려 실컷 연애를 해보고 싶기도 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부승희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러나 눈을 뜨니 조용한 방이 보였고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환상이 깨졌다.부승희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가 없었으며 자칫하다가 평생 이승우만 좋아할 수도 있었다.아무것도 모르던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해외를 떠나 자리를 비운 그 시간까지도 부승희의 마음속엔 이승우뿐이었다.그리고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던 이승우가 점차 식어가는 상상을 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러니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어?’부승희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알려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승우보다 더 끌리고 더 특별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더 이상 목메지 않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포기하기엔
달짝지근한 술이 목으로 넘어가고 이승우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기억 파편이 떠올랐다.이승우는 변명이라도 하려 했다.“나 최근 몇 년 동안 아무 사람도 안 만났어.”“나도 알아. 사업 때문에 바빴잖아.”부승희는 이승우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몇 년 지나고 일이 안정되면 곧 생길 거야.”“나도 좋은 사람 만나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 수 있어.”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오빠가 말하고도 웃기지 않아? 오빠는 절대 우리 오빠 같은 사람 아니니까 거짓말 마.”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지만 속이 문드러졌고 눈가가 따가워 차라리 두 눈을 감았다.“잠시 아픈 거랑 평생 아픈 거 차이는 나도 알아.”“두 달 지나고 모연준 그 새끼가 준 상처가 사라지면 나도 소개팅 받을 거야.”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혹시 알아? 그러다가 나도 찐사랑 만나게 될지.”너무 솔직한 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벌써 웨딩드레스를 입은 부승희가 떠올랐다.그래서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머릿속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했다.눈앞에 부승희가 보이자 부승희가 아직 다른 사람의 옆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이승우의 말에 부승희가 손을 휘휘 저었다.“다녀와.”이승우는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고 찬물을 켜 얼굴에 끼얹었다.차갑고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이승우는 멈추지 않았다.그러다가 세면대에 양손을 올려 지탱한 채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차가운 불빛이 비쳐오고 사방이 조용한 것이, 모든 게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똑똑똑.노크 소리와 함께 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졸린데 어느 방에서 자면 돼?”이승우는 빠르게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문을 열었다.부승희는 문 옆으로 기대 있다가 문이 열리는 찬 공기를 느꼈다. 그리고 이승우의 젖은 머릿결과 빨개진 눈가가 보였다.부승희는 못 본 척 외면하며 이승우를 재촉했다.“빨리. 나 나이가 들어 그런지 더 이상 밤새는 건 무리야.”이승우는 부승희의 옆으
부승희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왜 갑자기 웃어?”부승희가 고개를 돌려 이승우를 향해 말했다.“오빠는 다른 사람들이랑 좀 달랐어.”“뭐가 달랐는데?”이승우는 바로 구미가 당겨 자세를 고쳐 앉았다.“오빠는 좀 발랑 까졌잖아.”“뭐라고?”당황해하는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그 단어는 좀 아니다.”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좀 날티 났어.”“...”‘그게 뭔 차이가 있다고.’“난 또 착하고 바른 내 성심에 반한 건 줄 알았네.”“말이 되는 소리를 해.”“그때 우리 오빠 알지? 반듯하고 단정함의 표본이었잖아. 그런데 오빠는 연애도 실컷 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걸 보며 오빠가 좀 멋있다고 생각했어.”부승희는 이승우가 자신의 짝사랑을 몰랐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짝사랑은 다 티가 나는데 말이다.이승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후회가 찾아왔다.“혹시 내가 예전처럼 멋있지 않아서 날 안 좋아하는 거야?”부승희는 웃음이 터졌고 이승우를 힐끔 바라봤다.“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떠나기 전에 찐 사랑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그 사람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데 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 꺼내는 거야?”“쯧쯧. 그 여자분이 오빠 찬 거지?”“찬 건 아니고, 감정이 식어서 평화 이별한 거지.”“오빠는 참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어.”부승희가 비꼬았다.“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은 고쳤어.”부승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걸 퍽이나 믿겠어.’“그럴 필요 없어. 오빠는 그냥 신선한 사람이 좋은 거야. 다음 사람이 영원히 오빠의 찐 사랑인 거지.”이승우는 술기운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한참 부승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부승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사실 우린 같은 부류 사람이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오빠 뒤 쫓아다니는 게 아니었어.”이승우는 입꼬리를 내린 채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뭐가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