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새벽 3시에 양시연은 연정훈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다시 눕기로 했지만 등을 돌린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려 했다.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양시연도 일을 모두 연정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소현주를 처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도 임신 중인 그녀가 너무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가 양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양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운에 다녀온 이후 연정훈의 삼촌과 관련된 위험한 일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녀는 그가 처한 자리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체감했다.연정훈이 이미 양원에서 안정된 위치를 잡았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는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양시연은 그가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딜까, 걱정이 앞섰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이번 일은 큰일이 아니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일은 훨씬 많아. 소현주 일로 겁먹으면 나중에 더 큰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너한테 말하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큰일이 아니야.’연정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연정훈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은 정말 손가락을 까딱해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문제였다.하지만 양시연은 아직 그런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담담하지도 못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나한테 말하지 마요. 정훈 씨 혼자 다 감당해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혼자서 잘살아 봐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통수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숨기려던 게 아니야.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지금 내게 어떤 일도 작은 일일 뿐이고 네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이 양시연의 약점을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출근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마. 힘들면 집에 와서 쉬어.”연정훈은 옷을 갈아입으며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생필품을 캐리어에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닫으며 마치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여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정훈 씨도 무리하지 마세요. 밖에서 조심하세요."연정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살짝 흘겼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세요.”재촉하는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출발 직전 그는 양시연을 살짝 끌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현주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임성원에게 확인했는데 일을 아주 깔끔히 처리했대.”그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양시연의 얼굴이 조금 풀리며 한층 부드러워지더니 연정훈에게 물었다.“병원을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 소현주 씨의 사고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옮길 수 있었죠?”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결국 알아낼 수 있을 거야.”그 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천천히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서두르면 상대방이 계획적으로 만든 함정에 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양시연은 그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대비책이 준비된 상태라면 차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소현주 씨 상태는 어때요?”“사람은 깨어났는데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가요?”“지금은 그런 상태야. 병원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했어.”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에휴. 이제 당분간 이 골칫거리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네. 골치 아프게 되었어.’아이까지 가진 몸으로 남편의 전 여자친구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양시연은 불만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몰라요. 난 신경 안
“왜 갑자기 청소하고 싶지 않아졌어요?”양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반우희가 이렇게 높은 급여를 마다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반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요즘 조금 불편한 일이 있어서요.”양시연은 반우희의 집에 세 아이 중 누가 또 사고를 친 건 아닌지 떠올리며 부드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건가요?”반우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렸고 아무래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눈치였다.양시연은 눈동자를 굴리며 자기도 골치거리가 많지만 반우희의 사정이 궁금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반우희 씨,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저한테도 얘기 안하고요.”반우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그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요.”양시연은 손짓으로 반우희를 불렀다.‘여기로 와요.’“나한테만 얘기해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할게요.”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의자에 앉아 양시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두 손을 단정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부 대표님이 또 괴롭힌 거예요?”“그건 아니에요.”“그러면 뭐죠?”반우희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연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 대표님 저...요즘 다시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어요.”‘푸.’다행히 양시연은 차를 마시지 않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차를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속으로 흥미가 생겼고 반우희의 팔을 살짝 찌르며 물었다.“왜요?”반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이 내리던 날 부승원이 그녀를 안아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반우희는 몸을 숙여 손으로 턱을 괴고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냥 모르겠어요. 그런데 요즘 자꾸 멋있어 보여요. 하...”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우희 씨 참 솔직하네요. 만약 내가 우희 씨라면 이런 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거야.’“부
‘내가 반우희를 화나게 한 거야?’부승원은 드디어 천지가 뒤집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그가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것을 본 양시연은 손을 들어 밑으로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상황 좀 파악해 보려던 거예요. 보세요 반우희가 아직 어린애 같은 면이 있잖아요. 가끔 기분 상할 때도 있는 거죠.”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사소한 일은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청소해 줄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부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부승원은 양시연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서류를 집으려 손을 뻗자 양시연은 서류를 건네주며 가볍게 말했다.“반우희가 그러던데요. 요즘 부 대표님이 너무 잘생겨 보인대요. 자꾸 보고 싶어진다고요.”부승원은 당황해 순간 멈칫했다.???양시연은 펜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잠시 후에 오 회장님과 저녁 약속 있잖아요. 부 대표님은 먼저 하실 일 하세요. 약속 시간이 되면 같이 내려가요.”말을 마친 양시연은 서랍을 열어 아무렇지 않은 척 잉크를 꺼냈다.“만년필은 계속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게 정말 불편하네요.”부승원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의아한 척 물었다.“어? 아직 뭐 할 말 있으세요?”부승원은 잠시 망설이며 방금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했지만 다시 묻기도 애매해 결국 못 들은 척하며 얼굴을 굳히고 문을 나섰다.양시연은 뒤에서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었다.‘흥. 고상한 척은 잘해.’양시연은 부승원의 말투를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내가 뭐 청소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연정훈 씨랑 똑같네. 어쩐지 서로 친구가 되었구나.’그녀는 문득 연정훈이 오늘 오후에 돌아온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직도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문밖에서 부승원은 복도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있었다. 반우희가 요즘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것도 모자라 양시연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생각하니 부승원은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꿀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이든 집안에만 콕 박혀 지냈다.양시연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연정훈은 미룰 수 있는 약속을 최대한으로 미뤘으며 퇴근 시간만 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 셰프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해줬고 집 반찬이 질리는 날이면 두 사람은 새벽이라도 밖으로 나가 야식을 함께 했다.어느 날 아침, 연정훈은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침밥을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고개를 돌리니 양시연이 아침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나비와 똑 닮은 것 같았다.그래서 그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배고팠어? 아침 맛있게 먹네.”양시연은 셰이크를 한 잔 들이켜며 입맛을 다셨다.“나도 왜 이런지 잘 모르겠어요. 잠들기 전에도 잔뜩 먹었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아기가 식욕이 좋나 보지.”연정훈은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아기가 먹는데 나만 살이 쪄요.”“그래도 예뻐. 하나도 안 쪘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볼을 만지작거렸다.“계속 살이 안 쪘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예전에 입던 옷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에요.”“진심이야. 동글동글하니 귀엽기만 해.”양시연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입꼬리는 어느새 올라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출근 직전까지 알콩달콩했고 연정훈은 매일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양시연은 매일 같이 지각을 했지만 부승원은 막달이 된 양시연을 너그럽게 이해해 줬다.집을 나서기 전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말했다.“오전에 시간 되면 아버님, 어머님께 안부 전화해.”“걱정하지 마요. 매일 하고 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옷차림을 스캔하며 말했다.“정훈 씨는 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어요. 엄마가 매일 전화 와서 똑같은 안부 인사한다고 질려해요.”“시간 되면 우리가 직접 뵈러 가자.”“어휴 됐어요. 우리 엄마 아빠도 신
“네가 있어서 난 더 조심스러운 거야.”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양시연의 배를 빤히 바라봤다.“몇 달 뒤면 우리 아이가 태어날 텐데 아이와 네가 마음 놓고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잡아 배 위로 올리며 말했다.“이렇게 대단한 아빠가 있으니 편하게 지내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할지 눈에 보이는걸요.”연정훈은 다정한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내가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함께 넘어야 할 산이 있을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정훈 씨, 잘 생각했어요. 나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니까 나한테 기대요.”양시연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엔 내가 잘못 생각했어.”“알면 무릎이라도 꿇던가요!”그러자 연정훈은 웃음이 터졌다.“정말 무릎 꿇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프러포즈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한번 해주는 게 뭐 어때서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지 뭐.”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헐!”그리고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변태!”“내가 뭐 어쨌다고?”“그냥 변태예요!”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고 배도 만지게 못 하도록 했다.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양시연을 바라봤다.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양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조재민이라는 폭탄은 정훈 씨가 해결해 줘야겠어요. 난 우리 아버지 찾아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래도 조이현 씨 일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네가 직접 움직일 필요 없어. 사람 시켜 조씨 가문에 따로 얘기하게 할 거야.”“그러지 마요. 정말 그러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요. 조이현 씨 정상도 아닌데 조씨 가문 사람들이 고분고분 말을 따를 거라는 보장 있어요?
연정훈은 입을 열기도 전에 뭇매를 맞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양시연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연정훈의 다리를 걷어찼다.“뭔 데요! 일단 무릎이라도 꿇고 말하던가요!”연정훈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가법이 생기기 전의 일이니까 정상 참작 안 돼?”“그건 옆 방 변호사한테 물어보던가요!”“싫어.”연정훈은 옷을 정리하며 양시연의 두 볼을 잡고 빠르게 뽀뽀했다.“물어볼 거 없어.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릎 꿇을까?”퍽.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또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허구한 날 말장난만 하는 사람이 교수라니. 가당치도 않아.’양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빨리 말해봐요. 더 늦으면 정말 화낼지도 몰라요.”연정훈은 맞은 편의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요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얌전히 듣고 있던 양시연이 입을 열었다.“그럼 마봉식이 퇴출하면 아버님이 더 올라가실 수 있다는 말이에요?”“이론적으로는 그렇지.”양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아버님을 제외하면 누가 유력한데요?”“표원정.”양시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표원정이 누군지 떠올렸다. 아마도 몇 년 전 주변 사람에 대해 외울 때 들어본 이름 같았다.“그 사람 서운시로 발령된 거 아니었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설마 낙하산?”“그럴 가능성도 있지.”양시연은 연재혁의 나이를 계산하며 말했다.“그래도 아버님은 아직 젊으시니 이번이 아니더라도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지금은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지.”“우린 뭘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 아버지한테 연락해 볼까요?”양시연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 연정훈은 웃음이 터졌다.그래서 이마에 작게 땅콩을 먹이며 말했다.“이게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우리가 안 되면 어른들 모셔 오게?”양시연이 입을 삐죽였다.“그게... 그 뜻이 아니었어요?”“아버지 일에는 우리가 가입할 필요 없어. 아버지에게 기회가 차려진
다른 한편, 옆 방 대기실 침대에서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감정을 한 번에 몰아붙이느라 숨도 돌릴 여유가 없었다.양시연은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그래서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연정훈의 체온을 피부로 느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동안 두 사람이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원망하고 사랑했던 시간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입술을 맞추니 연정훈의 숨결이 얼굴에서 느껴졌다. 양시연은 흐릿한 시야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고 연정훈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을 더 파고들며 두 눈을 감고 연정훈의 사랑을 느꼈다.한참 뒤, 양시연이 코를 훌쩍이며 연정훈의 귀를 만지작거렸다.“그날 밤 확인하라고 했는데 안 해서 잊어버린 줄만 알았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며 말을 이었다.“그땐 소현주 쪽 소식을 기다리느라 여유가 없었어. 네 의심대로 나도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해졌거든.”“그리고 그동안 너도 많이 바빴으니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내가 뭐 다른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조그만 가능성도 줄이려고 그러는 거지.”소현주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 양시연은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다.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도둑 맞힌 것을 되찾아왔으니 다행이기도 했으나 뺏긴 시간에 아쉬움도 많았다.그러나 연정훈이 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양시연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깨끗이 지우기로 했다.그래서 연정훈의 품에 안겨 입을 꾹 다물고 연정훈의 체온을 느꼈다.그런데 한참 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양시연은 조금 부끄러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왜 그렇게 봐요?”연정훈이 말했다.“믿기지 않아서.”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운명이라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그렇게 많은 시공 속에 두
“좋아요!”반우희는 선물 박스를 품에 안은 채로 부승원의 옆자리에 앉았고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저한테 처음 주신 선물인데 아껴서 잘하고 다닐게요!”부승원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래. 어디 헐값에 팔지나 마.”“그럴 리가요!”반우희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변호사님이 선물하신 건데 아주 대대손손 물려줄 거예요!”“...”‘그 말을 퍽이나 믿겠어.’반우희는 팔찌를 이리저리 살폈고 평소라면 죽을 못 쓸 케이크도 뒷전이 되어 버렸다.그러나 부승원은 반우희가 팔찌만 애지중지 모시는 게 못마땅한 듯 이런 말을 했다.“이 팔찌 5,200만 원이야.”반우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바로 팔찌를 움켜쥐었다.‘세상에!’“...”반우희는 바로 부승원의 품으로 달려들어 얼굴에 뽀뽀 세례를 했다.이런 반우희의 열정에 못 이겨 부승원은 몸이 뒤로 젖혀졌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우희는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고 뽀뽀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변호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그리고 아직도 성에 차지 않은 건지 또 얼굴에 입술 도장을 세게 찍었다.부승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입꼬리가 실룩거렸다.“돈 밝히지 않는다면서 팔찌만 보고 케이크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 봐? 팔찌가 그렇게 좋아?”“케이크야 당연히 곧 내 배 안으로 들어갈 거니까 급할 필요 없어요.”반우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선물 받고 바로 뽀뽀해 주는 게 아니라 가격 듣고 뽀뽀해 주는 거 다 봤어.”그러자 반우희는 바보같이 헤헤 웃어버렸고 얼굴을 부승원의 품에 비볐다.“이렇게 비싼 선물은 처음 받아봐요.”부승원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말했다.“가격은 중요하지 않고 마음이 중요하다는 빈말 같은 건 안 해?”그러나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정연하게 늘어놨다.“에이, 그러다가 변호사님이 믿어버리면 어떡해요? 내가 어떤 선물을 받아도 좋아하면 다시 비싼 선물 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어쭈? 똑똑한데?’반우희는 흥분한 상태로 한참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