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퇴근 시간이 되어 양시연은 저녁 약속 장소로 갔다. 연정훈에게서 여전히 연락이 없었지만 양시연은 마음을 다잡고 미팅에 집중하기로 했다.3개월 동안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조언을 받긴 했지만 당연히 술자리에서는 숨기지 않았다.이사회는 이미 양시연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술은 양시연 쪽으로 오지 않았고 겉으로는 꽤 배려심 있어 보였다.그러나 몇 차례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누군가 입을 열었다.“양 대표님 임신 중이시라면 집에서 푹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인 그룹도 이렇게 오래 걸어왔고 인재도 넘쳐나지 않습니까. 연 대표님이 남긴 유능한 인재들뿐만 아니라 부 변호사도 돕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맞아요.”“안 되면 우리 같은 이 늙은이들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겉치레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여러분께서 뒤에서 버텨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런 때에 어떻게 감히 임신했겠어요. 앞으로도 여러분께 의지할 일이 많을 겁니다. 지금은 아직 힘들지 않으니 괜히 짐을 더 드리지는 않겠습니다.”그러면서 양시연은 잔을 들고 말했다.“제가 술 대신 차로 여러분께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말에 응했다.양시연은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은 마실 수 있었다. 연정훈이 남겨둔 사람들이 있는 데다 부승원은 최근 그녀의 절친 동맹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많은 일을 부승원이 처리해 주었기에 이사회 사람 중 일부는 부승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자연스럽게 술잔이 부승원 쪽으로 몰렸다.다행히 참석한 양쪽 인원 모두 적지 않았고 양시연은 뻔뻔한 면모도 갖추고 있어 누군가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하면 과일 주스를 들고 그 사람에게 단독 건배를 제안했다.“이렇게 하죠. 제 체면을 봐서 저는 원샷 할 테니 편하게 드세요.”“아니에요. 그건 안 되죠.”‘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 배 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텐데!’결국 임원들은 조금 자제할 수밖에
‘내가 반우희를 화나게 한 거야?’부승원은 드디어 천지가 뒤집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그가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것을 본 양시연은 손을 들어 밑으로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상황 좀 파악해 보려던 거예요. 보세요 반우희가 아직 어린애 같은 면이 있잖아요. 가끔 기분 상할 때도 있는 거죠.”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사소한 일은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청소해 줄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부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부승원은 양시연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서류를 집으려 손을 뻗자 양시연은 서류를 건네주며 가볍게 말했다.“반우희가 그러던데요. 요즘 부 대표님이 너무 잘생겨 보인대요. 자꾸 보고 싶어진다고요.”부승원은 당황해 순간 멈칫했다.???양시연은 펜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잠시 후에 오 회장님과 저녁 약속 있잖아요. 부 대표님은 먼저 하실 일 하세요. 약속 시간이 되면 같이 내려가요.”말을 마친 양시연은 서랍을 열어 아무렇지 않은 척 잉크를 꺼냈다.“만년필은 계속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게 정말 불편하네요.”부승원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의아한 척 물었다.“어? 아직 뭐 할 말 있으세요?”부승원은 잠시 망설이며 방금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했지만 다시 묻기도 애매해 결국 못 들은 척하며 얼굴을 굳히고 문을 나섰다.양시연은 뒤에서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었다.‘흥. 고상한 척은 잘해.’양시연은 부승원의 말투를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내가 뭐 청소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연정훈 씨랑 똑같네. 어쩐지 서로 친구가 되었구나.’그녀는 문득 연정훈이 오늘 오후에 돌아온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직도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문밖에서 부승원은 복도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있었다. 반우희가 요즘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것도 모자라 양시연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생각하니 부승원은
“왜 갑자기 청소하고 싶지 않아졌어요?”양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반우희가 이렇게 높은 급여를 마다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반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요즘 조금 불편한 일이 있어서요.”양시연은 반우희의 집에 세 아이 중 누가 또 사고를 친 건 아닌지 떠올리며 부드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건가요?”반우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렸고 아무래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눈치였다.양시연은 눈동자를 굴리며 자기도 골치거리가 많지만 반우희의 사정이 궁금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반우희 씨,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저한테도 얘기 안하고요.”반우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그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요.”양시연은 손짓으로 반우희를 불렀다.‘여기로 와요.’“나한테만 얘기해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할게요.”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의자에 앉아 양시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두 손을 단정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부 대표님이 또 괴롭힌 거예요?”“그건 아니에요.”“그러면 뭐죠?”반우희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연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 대표님 저...요즘 다시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어요.”‘푸.’다행히 양시연은 차를 마시지 않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차를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속으로 흥미가 생겼고 반우희의 팔을 살짝 찌르며 물었다.“왜요?”반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이 내리던 날 부승원이 그녀를 안아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반우희는 몸을 숙여 손으로 턱을 괴고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냥 모르겠어요. 그런데 요즘 자꾸 멋있어 보여요. 하...”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우희 씨 참 솔직하네요. 만약 내가 우희 씨라면 이런 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거야.’“부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출근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마. 힘들면 집에 와서 쉬어.”연정훈은 옷을 갈아입으며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생필품을 캐리어에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닫으며 마치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여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정훈 씨도 무리하지 마세요. 밖에서 조심하세요."연정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살짝 흘겼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세요.”재촉하는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출발 직전 그는 양시연을 살짝 끌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현주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임성원에게 확인했는데 일을 아주 깔끔히 처리했대.”그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양시연의 얼굴이 조금 풀리며 한층 부드러워지더니 연정훈에게 물었다.“병원을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 소현주 씨의 사고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옮길 수 있었죠?”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결국 알아낼 수 있을 거야.”그 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천천히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서두르면 상대방이 계획적으로 만든 함정에 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양시연은 그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대비책이 준비된 상태라면 차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소현주 씨 상태는 어때요?”“사람은 깨어났는데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가요?”“지금은 그런 상태야. 병원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했어.”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에휴. 이제 당분간 이 골칫거리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네. 골치 아프게 되었어.’아이까지 가진 몸으로 남편의 전 여자친구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양시연은 불만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몰라요. 난 신경 안
새벽 3시에 양시연은 연정훈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다시 눕기로 했지만 등을 돌린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려 했다.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양시연도 일을 모두 연정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소현주를 처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도 임신 중인 그녀가 너무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가 양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양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운에 다녀온 이후 연정훈의 삼촌과 관련된 위험한 일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녀는 그가 처한 자리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체감했다.연정훈이 이미 양원에서 안정된 위치를 잡았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는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양시연은 그가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딜까, 걱정이 앞섰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이번 일은 큰일이 아니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일은 훨씬 많아. 소현주 일로 겁먹으면 나중에 더 큰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너한테 말하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큰일이 아니야.’연정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연정훈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은 정말 손가락을 까딱해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문제였다.하지만 양시연은 아직 그런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담담하지도 못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나한테 말하지 마요. 정훈 씨 혼자 다 감당해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혼자서 잘살아 봐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통수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숨기려던 게 아니야.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지금 내게 어떤 일도 작은 일일 뿐이고 네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이 양시연의 약점을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