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 강하리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 안예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아버님이 또 회사에 왔어요! 빨리 와보세요! 대표님한테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강하리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SH그룹의 로비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찬수가 한눈에 보였다.“담배 꺼요, 당장.”강하리는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강찬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딸이 하는 말은 들어야지.”“나가서 얘기해요.”강하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다.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강찬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우리 딸 출세했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도 들어올 수 있고 말이야!”“왜 또 왔어요? 이젠 구 대표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예요?”“하! 내가 내 딸을 보러 온다는데,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더 크게 말해요. 그러면 알 수 있겠네요, 대표님이 간섭할지 안 할지. 대표님 앞에서는 정신병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요.”정서원은 강찬수가 지나가는 차도에 밀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강하리는 줄곧 그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법률의 구멍을 파고들었다.강찬수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반대로 강하리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강찬수는 약간 멈칫하다가 본론을 꺼냈다.“돈 줘. 돈만 주면 다시는 안 올게!”“돈 없어요.”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 도박에 빠진 강찬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달라는 말을 한다.강하리도 그냥 안 주는 것이 아닌, 진짜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돈은 정서원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구라치지 마! 이런 데서 일하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돼?!”강찬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
강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아마도 18살 되던 해부터일 것이다. 강찬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정서원과 수도 없이 싸우면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 붙으면서 집을 떠난 다음에야 강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물론 이는 절대 구승훈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아뇨.”“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구승훈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다름 아닌 강찬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을 가리켰다.“다음은 없을 거예요. 저 사직하기로 했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홧김에 한 말이 아닌가 보네.”“네.”“하하... 그래, 그럼 나도 시간을 뺏지 않을게.”구승훈의 웃음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강하리는 영혼 없이 대답하기만 했다.“네.”마지막으로 강하리를 힐끗 본 구승훈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함께 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도발적이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구승훈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보다도 여자를 더 빨리 바꾸는 사람이 구승훈이었다.구승훈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가슴은 자꾸만 욱신거렸다.‘괜찮아, 난 이제 떠날 거니까. 떠나면 분명히 잊을 수 있을 거야.’회사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번에는 또 누가 퍼뜨렸는지, 회사 단톡방에는 벌써 그녀가 사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하리가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구승훈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제를 모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강하리는 단톡방을 힐끗 보기만 하고 나왔다. 회사 단톡방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저 오늘은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강찬수와 마주쳤다.“아이고, 우리 딸이 또 엄마 만나러 왔나 보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이를 악물었는데도 강찬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 나는 돈을 원한다고.”“당신 조만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너희 모녀를 만난 게 내 죗값을 치르는 거야.”말을 마친 강찬수는 강하리를 팍 밀치고 멀어져갔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분노에 잠겨서 손을 벌벌 떨었다. 하필이면 이때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그녀는 곧바로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갑자기 흥분해서 그럴 거야.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기분을 진정시켜. 그래도 계속 아프면 병원에 한 번 와봐.”전화를 끊고 난 강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말이다.다행히 손연지의 말대로 하자 통증은 금방 가셨다.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강하리는 입원 병동 안으로 들어가서 정서원을 살폈다. 그리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하고 또 했다.“만약 강찬수가 다시 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병원에서 떠난 다음 강하리는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낼 기분이 아니었다.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같은 시각, 강하리가 전화 온 것을 발견한 구승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강 부장? 나한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저...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구승재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는 사람을 잡아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하의 강하리가 돈을 빌려달라면서 전화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승재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강 부장 일 때문에 형이 내 카드를
구승훈이 음침한 눈길로 말했다.“강 부장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새로운 부장의 임명을 지체하지 말고.”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기획안을 구승훈 앞에 내려놓았다.“이건 신제품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더 보충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구승훈은 더 말 없이 곧장 기획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는 업무에 대해서 늘 진지한 태도였다. 아니, 까다롭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강하리에게 나가 보란 말을 안 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기획안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고작 열몇 페이지였다.하지만 구승훈은 무려 한 시간 남짓 확인했다.조목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서명하고 강하리에게 돌려줬다.강하리는 기획안을 손에 넣고 잠시 머뭇거렸다.“또 용건 있어?”구승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 없습니다.”“그래, 나갈 때 문 잘 잠가.”말을 마친 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이고 다른 업무를 처리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방금 그녀는 하마터면 구승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아마도 진짜 강찬수 때문에 궁지에 몰린 듯싶다.이 남자가 돈을 빌려줄 리 있을까?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퇴근 후 그녀는 곧바로 그해 엄마의 소송을 도와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그녀는 상대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임 변호사님, 이런 상황은 공갈 협박죄에 해당하나요?”임정원이 잠시 침묵한 후 대답했다.“아직은 공갈 협박으로 고소할 수 없어요. 상대가 법률상에서 친아버지이고 하리 씨는 실질적인 부양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만약 상대가 이걸 단지 부양비라고 고집한다면 하리 씨는 거의 승산이 없어요. 기껏해야 상대를 비판하고 교육하는 것뿐인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 보복할까 봐 걱정이네요.”강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리 씨 어